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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초기불교 순례_임승택 교수

임승택 교수의 초기불교순례 51-60

51. 바른 의도(정사유正思惟)

바른 견해 바탕으로 한 실천적 태도


바른 의도란 무엇인가.

팔정도의 두 번째 항목으로서 마음을 올곧게 쓰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가끔 '바른생각'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러나 팔정도의 바른 의도란 일반적인 생각이나 사고와 구분되며, 바른 견해를 바탕으로 한 실천적 태도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의지 혹은 욕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한역에서는 이것을 바른 의지(正志)로 번역하기도 한다.

경전에서는 바른 의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른 의도란 무엇인가.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떠나려는 의도, 성내지 않으려는 의도, 해치지 않으려는 의도이다. 이것을 바른 의도라고 한다(DN.Ⅱ. 312)." 이와 같이 바른 의도는 불건전한 마음과 대조를 이룬다. 불건전한 마음이 발생하면 일단 바른 견해와 지혜로써 그것의 본질을 꿰뚫어야 한다. 삿된 마음의 허구성을 통찰하면 거기에 매이지 않고 초연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는 볼 수 없다. 바른 의도로써 견해와 지혜에 부합하는 행위에 나서야만 한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견해는 그 자체로서 행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우리는 이성적 존재인 감성적 존재이기도 하다. 실제로 우리는 많은 부분 감성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때로는 관용과 아량으로 자신과 타인을 감쌀 필요도 있으며 적당한 선에서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한 경우 이성적·합리적 판단만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 자신만이 옳다는 생각을 뛰어넘는 담대함과 따스함을 갖추어야 한다. 바로 거기에서 부각되는 것이 바른 의도이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닉은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해로움을 끼친다. 지혜를 흐리게 하고 열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든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인식했다면 감각적 쾌락에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의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것이 없다면 쾌락에 이끌리는 상태를 종식시킬 수 없다. 바른 의도는 감각적 쾌락에 쏠린 마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스스로를 쾌락의 노예 상태로부터 분연히 떨쳐 일어나게 해준다.

성내는 마음과 해치려는 마음은 어떠한가. 이들은 주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폭력적 성향들은 불현듯이  터져 나와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간다. 그리하여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주고 결국은 스스로에 대해서도 경직과 고립을 가져온다.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방지하기 위해 자애로운 마음을 길러야 한다. 자애로운 마음이란 모든 존재들이 잘 되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더욱 유연해진 마음으로 자신과 타인 모두를 행복으로 이끌 수 있다.

자애로운 마음은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보호한다. 다음의 경구가 그것을 말한다.

"비구들이여, 자기를 보호하면서 남을 보호하고, 남을 보호하면서 자기를 보호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남을 보호하면서 자신을 보호하는가. 인내와 비폭력과 자애와 연민의 마음에 의해서이다(SN.Ⅴ169)." 

이렇듯 타인을 향해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닦는 것은 결국 나 스스로를 위한 닦음이 될 수 있다.

팔정도의 바른 의도란 바른 견해를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최초의 바른 견해는 지혜를 닦는 것에 해당한다. 반면에 바른 의도는 자비를 닦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균형있게 닦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어느 한쪽에 치우칠 경우 '무정한 사람' 혹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치부될 수 있다. 

이 두 가지가 전제될 때 우리는 자신과 타인 모두를 위한 원만한 실천에 매진할 수 있다. 바른 의도는 바른 견해와 바른 행위를 잇는 중간적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52. 바른 정어言語 

진실만 말하겠다는 적극적인 태도


바른 언어란 무엇인가.

팔정도의 세 번째 항목으로서 바르게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특히 도성제에 속한 이것은 사성제에 입각하여 바른 견해에 부합하는 언어를 구사하는 것을 일컫는다. 바른 언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바른 언어란 무엇인가. 거짓말로부터 떠나는 것, 이간하는 말로부터 떠나는 것, 거친 말로부터 떠나는 것, 꾸며대는 말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바른 언어라고 한다(DN.Ⅱ.3121)."

팔정도의 여덟 항목은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바른 견해와 바른 의도는 지혜慧, 바른 언어와 바른 행위 그리고 바른 삶은 계율律, 바른 노력과 바른 지킴 그리고 바른 삼매는 선정定에 배대할 수 있다. 지혜의 영역에 속한 첫 두 항목이 갖추어 질 때 올바른 실천에 매진할 수 있다. 거기에서 바른 언어는 첫 번째 과제로 부각된다. 바른 언어란 단지 거짓말 따위를 하지 않는 소극적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이것은 진실만을 말하겠다는 적극적인 태도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언어란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도구이다. 따라서 이것은 반드시 타인과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해서 혼자서 살아가는 환경에 처해 있다면 굳이 언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바른 언어를 포함하는 팔정도의 실천은 혼자만의 고립된 수행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초기불교의 수행의 또 다른 면모를 엿보게 된다. 팔정도는 타인과의 관계 문제에서 개방적이다. 모든 인연을 끊고서 홀로 닦아나가는 그러한 수행이 아니다.​

잘못된 언어를 삼가고 진실한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바른 지혜를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른 견해는 선행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바른 견해가 선행하는가? 잘못된 언어를 잘못된 언어라고 알고, 바른 언어를 바른 언어라고 안다면 그것이 바른 견해이다(MN.Ⅲ.73)."이렇듯 팔정도의 항목들은 유기적인 연관성을 지니며, 특히 바른 견해는 모든 실천에서 전제되어야 할 기본이 된다. 여기에서 지혜 혹은 깨달음을 강조하는 불교의 특성이 다시 한 번 확인된다.

바른 언어 또한 지혜의 성취 여부에 따라 두 가지 차원으로 나뉜다. "비구들이여, 바른 언어에 대해 나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공덕은 있으되 번뇌가 남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언어가 있다​. 또한 비구들이여, 거룩하고 번뇌가 없는 출세간의 도의 요소에 해당하는 바른 언어가 있다(MN.Ⅲ.73~74)." 전자는 재가자를 비롯하여 아직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반면에 후자는 멸성제 혹은 열반을 실현한 이들이 닦는 거룩한 언어이다.

대부분의 경우 거짓말이라든가 이간하는 말 혹은 거친 말 따위에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이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언어는 스스로의 내면에 숨겨진 부정적 정서와 사고를 알아차리게 해주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바른 언어의 사용이 단순히 윤리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른 언어는 정신적 향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바른 언어를 구사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바른 언어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부합한다. 이것은 내면의 세계와 외부적 환경의 일치를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바른 언어는 환상이나 허구가 아닌 현실의 세계에 발을 딛고 서게 하는 발판이 된다. 거룩한 바른 언어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떠난 출세간의 경지에 속한다.

이와 같이 번뇌를 벗어난 언어는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료하는 묘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불화와  분열을 막고 지혜와 평화를 증장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53. 바른행위 正業

옳고 그른 행위 잘 구별해 실천하는 것


바른 행위란 무엇인가.

팔정도의 네 번째 항목으로 옳지 않은 행위를 멀리하고 옳은 행위만을 잘 구별하여 실천하는 것을 가리킨다. 특히 이것은 계율의 준수와 깊은 관련을 지닌다. 우리는 바른 행위가 전제될 때 본격적인 명상의 실천을 옮겨갈 수 있다. 

"유익한 법(선법善法)의 처음은 무엇인가. 계율의 청정이면 견해의 올바름이다. 비구여, 이와 같이 비구가 계율이 청정하고 견해가 올바르다면 계율에 의지하고 계율 위에 서서 사념처四念處를 닦아야 한다.(SN.Ⅴ.143)."

경전에서는 바른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른 행위란 무엇인가. 살생으로부터 떠나는 것, 주지 않은 것을 취하는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 감각적 쾌락에 빠진 음란한 행위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바른 행위라 한다(DN.Ⅱ.312)." 이와 같이 바른 행위는 붓다의 제자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수칙들로 이루어진다. 이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준수는 자발적 의지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대사십경'에서는 바른 행위 또한 두 가지로 구분한다. 

"비구들이여, 바른 행위에 대해  나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공덕은 있으되 번뇌가 남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바른 행위가 있다. 또한 비구들이여, 거룩하고 번뇌가 없는 출세간의 도의 요소에 해당하는 바른 행위가 있다(MN.Ⅲ. 74)." 전자는 재가자에게 초점을 맞춘 가르침으로 의도적인 노력(정진精進)과 마음지킴(염念)을 통해 닦아 나가야 한다. 반면에 후자는 멸성제 혹은 열반을 실현한 이들에게 드러나는 거룩한 행위이다.

'번뇌가 남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바른 행위'는 앞서 언급한 3가지 수칙과 동일하다(MN.Ⅲ.74). 그런데 이것은 재가신도 일반에게 요구되는 오계五戒보다 더욱 간결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주목을 끈다. 따라서 이것은 주변 여건에 상관없이 웬만하면 지켜나갈 수 있다. 애매한 상황에 처해 "과연 술을 마셔야 하는가" 혹은 "선의의 거짓말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두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냥 그대로 지킬 수 있는 최소한  수칙들이 이 경우의 바른 행위이다. 반면에 '거룩하고 번뇌 없는 출세간의 바른 행위'는 다음과 같다. 

"거룩한 마음, 번뇌 업는 마음, 거룩한 길의 요소를 갖춘 자가 거룩한 길을 닦았을 때 세 가지 악한 신체적 행위로부터의 벗어남과 멀리함과 물러남이 생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거룩하고 번뇌 없는 출세간의 도의 요소에 해당하는 바른 행위이다(MN.Ⅲ.74~75)."

재가자의 경우 살생과 도둑질과 성적 문란이라는 세 가지는 의지적인 제거의 대상이 된다. 반면에 번뇌를 소멸한 거룩한 이들은 닦음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것들로부터 멀어진다.

살다가 보면 누구든 부적절한 상황에 처하여 가슴 한 켠 말 못할 비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만약에 그것이 세 가지 악한 행위에 관련된 것이라면 적절한 참회의 시간이 필요하다. 다시는 그러한 악행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세워야 할 것이다. 목숨을 버릴 지라도 이것만큼은 허물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소소한 잘못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허둥댈 필요 없이 훌훌 털어낼 수 있다. 팔정도가 규정하는 바른 행위를 저촉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팔정도의 바른 행위는 결코 복잡하거나 거창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할 이유가 없다. 바른 행위에 포함된 세 가지는 모든 계율 항목 가운데 기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떳떳하다면 최소한 팔정도의 한 항목은 이미 실현한 셈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신감으로 명상의 실천에 매진해 나가야 하며, 또한 스스럼 없이 살아갈 필요가 있다. 


   

54. 바른 삶(정명正命)

올바른 생활수단으로 살아가는 것


바른 삶이란 무엇인가.

팔정도의 다섯 번째 항목으로서 그릇된 생활수단을 멀리하고 올바른 생활수단을 통해 건전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바른 생계로 번역하기도 한다. 재가자의 경우 적절한 직업을 통해 건전한 경제적 활동을 영위해 나가는 것이 바른 삶이다. 한편 출가자의 경우는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수행에 매진하는 것이 바른 삶이다. 

"비구들이여, 여기에서 한 거룩한 제자가 그릇된 삶을 버리고 바른 삶에 의해 삶을 영위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바른 삶이라 한다(DN.Ⅱ.312)."

수행자가 버려야 할 잘못된 생활수단의 사례는 어떠한가. "무엇이 그릇된 삶인가. 기만·요설·점술·사기이다. 또한 이미 얻은 것으로 얻음을  추구하는 것이다(MN.Ⅲ.75)." 여기에 열거된 항목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끼친다. 선량한 많은 사람들에게 좌절과 절망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이와 같이 그릇된 방법을 통해 얻은 이익은 두고두고 원망과 분쟁을 낳는다. 이것은 악한 업의 씨앗이며 스스로의 정신적 성취에도 장애가 된다.

'대사십경'에서는 바른 삶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비구들이여, 바른 삶에 대해 나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공덕은 있으되 번뇌가 남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바른 삶이 있다. 또한 비구들이여, 거룩하고 번뇌가 없는 출세간의 도의 요소에 해당하는 바른 삶이 있다( MN.Ⅲ.75)." 전자는 주로 재가자에게 해당되며 올바른 생계수단을 가리킨다. 반면에 후자는 멸성제 혹은 열반을 실현한 이들이 드러내는 거룩한 삶 자체이다.

경전에선 다섯 생계수단을 피하라고 가르친다. "재가신도는 다섯 가지 장사에 종사해서는 안된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무기장사, 사람장사, 고기장사, 술장사, 독약장사이다(AN.Ⅲ. 208)." 이러한 유형의 생계수단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생명을 돈벌이로 활용한다. 이들은 다른 존재에게 해로움을 끼치며 그들의 삶 전체를 망가뜨릴 수 있다. 자비로운 마음을 강조하는 불교에서 이러한 부류의 생계수단은 용인될 수 없다.

우리는 재가자로서 경제활동을 해야만 한다. 적절한 생계수단을 지니고서 근면하게 일해야 한다. 이미 몸담은 직업이 자신과 타인의 행복을 증진하는 데 보탬이 된다면 정말 다행한 일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더욱 열심히 매진해야 할 것이다. 또한 아직 직업을 얻지 못했다면 자신의 역량을 고려하여 시급히 찾아야 할 것이다. 적절한 생계수단을 지니고서 근면하게 일해야 한다. 이미 몸담은 직업이 자신과 타인의 행복을 증진하는 데 보탬이 된다면 정말 다행한 일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더욱 열심히 매진해야 한다. 또한 아직 직업을 얻지 못했다면 자신의 역량을 고려하여 시급히 찾아야 할 것이다. 아래의 경전은 이러한 상황에서 약간의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갠지스 강에 소금덩이를 넣는다고 치자.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갠지스 강은 이 소금덩이 때문에 마실 수 없이 짜게 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존이시여, 갠지스 강은 많은 물이 모여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어떤  사람이 몸을 닦고 계를 닦고 마음을 닦고 지혜를 닦아 모자람 없이 위대하게 한량없이 머문다고 치자. 

"비구들이여, 그러한 사람에게는 현세에 겪게 될 이미 지은 작은 악업은 남아 있을 수 있지만[내세에 겪게 될 악업의 결과는]조금도 남지 않을 것이다.…(AN.Ⅰ.250)."



55. 바른 노력(정정진正精進)

노력하고 마음을 잡아 힘 쓰는 것


바른 노력이란 무엇인가. 

팔정도의 여섯 번째 항목으로 바르게 실천에 매진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수행의 여정에서 가장 기본이 된다고 할 수 있으며, 팔정도의 나머지 항목들에 대해 그 에너지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바른 노력은 사정단(四正斷, cattaro sammappadhana)으로 달리 일컬어지기도 한다. 특히 팔정도에 배속된 바른 노력이란 명상의 실천영역[정온定蘊]에 속한다. 이것을 통해 정신적 고양을 위한 직접적인 연마의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바른 노력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여기에서 비구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그릇되고 이롭지 못한 법들을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해 의욕을 일으켜 정진한다. 노력을 일으키고 마음을 잡아 힘쓴다. 이미 생겨난 그릇되고 이롭지 못한 법들을 끊기 위해 의욕을 일으켜 정진한다. 노력하고 마음을 잡아 힘쓴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이로운 법들을 생겨나게 하기 위해여 의욕을 일으켜 정진한다. 노력하고 마음을 잡아 힘쓴다. 

이미 생겨난 이로운 법들을 바로 세우고, 혼란스럽지 않게 하고, 증장시키고, 풍성하게 하고, 닦고, 원만하게 하기 위해 의욕을 일으켜 정진한다​. 노력하고 마음을 잡아 힘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바른 노력이라 한다(DN. Ⅱ.312~313)."

'아직 생겨나지 않은 그릇된 법들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해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는 것'이란 잘못된 무언가를 막기 위한 노력에 해당한다. 인간은 감각적 쾌락의 지배를 받는 세계[욕계欲界]를 살아간다. 따라서 언제든지 감각적 유혹이 대상에 빠져들 수 있다. 어찌 보면 감각의 유혹을 뿌리치려는 시도는 본능에 반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인식한다면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된다. 잘못된 상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인연을 만들지 않으려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감각적 유혹에 이미 노출된 상태에서 그것을 거스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미 생겨난 그릇되고 이롭지 못한 법들을 끊기 위해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는 것' 이란 잘못된 무언가를 끊기 위한 노력에 해당한다. 이것은 이미 지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는 것을 가리킨다.​ 살다보면 때로는 부적절한 상황에 빠져 잘못된 일을 저지를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과거의 잘못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개선하느냐의 여부이다. 잘못된 습관과 행동으로부터 벗어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고서 즉각적인 변화에 나서야 한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이로운 법들을 생겨나게 하기 위해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는 것' 이란 자신을 계발하기 위한 노력에 해당한다. 이것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를 성취하지 못한 이상 스스로에 대해 자만해서는 안 되다. 어쩌면 깨달음의 경지란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가 굳건히 확립되어 더 이상 그러한 노력을 멈출 수 없는 상태일 수 있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될 때 '이미 생겨난 이로운 법들을 바로 세우고 원만하게 하기 위한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갈 수 있을 것이다.

바른 노력이란 원만한 닦음을 위해 거듭 분발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재가자와 출가자 사이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또한 이미 번뇌를 제거한 거룩한 존재와 그렇지 못한 범부 사이의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가 이룬 정신적 경지는 다를 수 있지만 그럼에도 한결같이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 바른 노력이다.

따라서 '대사십경'에서는 이것을 바른 견해(정견正見)라든가 바른 의도(정사유正思惟) 따위와 달리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하지 않는다(MN.Ⅲ.72~77).

바른 노력은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요구된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56. 바른 마음지킴(정념正念)

깨인 마음 유지해 나가는 것 

   

바른 마음지킴이란 무엇인가. 

팔정도의 일곱 번째 항목으로 깨인 마음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지킴sati 이란 초기불교 명상에서 가장 중요한 심리적 원리로 꼽히며 ​원래의 의미는 '잊지 않음'이다. 특히 팔정도의 바른 마음지킴은 사념처四念處와 동일한 내용을 지닌다. 사념처란 몸·느낌·마음·법에 대해 잊지 않고서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명상법이다. 이것을 실천하는 와중에는 주관적인 생각이나 바람 따위를 개입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경험하고 있는 외부적인 현상이나 내면의 정서 혹은 감정 따위를 투명하게 직시하는 것만이 요구된다.

마음지킴이 유지되면 혼란하거나 어수선한 마음이 차츰 가라앉는다. 또한 그간 흘려보냈던 현상들에 대해 그 본질을 알아차리게 된다. 앞의 경우는 고요함을 의미하는 사마타(지止, samatha)에 해당하고, 뒤의 경우는 진리에 대한 통찰을 의미하는 위빠사나(관觀,vipassana)에 배대할 수 있다. 이들은 선정定과 지혜慧로 달리 일컬어지기도 하며 마음지킴을 통해 얻게 되는 정신적 능력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의 개발은 궁극적인 깨달음을 실현하는 발판이 된다. 이것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실제적 원리인 바른 마음지킴은 바른 견해, 바른 노력과 더불어 팔정도에서 가장 기본적인 세 항목으로 꼽힌다(MN.Ⅲ.72).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른 마음지킴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한 비구가 있어, 몸身에 관련하여 몸을 지긋이 관찰하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을 지니고서, 세간에 속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느낌受에 관련하여… 중략…  마음心에 관련하여 … 중략… 법法에 관련하여 법을 지긋이 관찰하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을 지니고서, 세간에 속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머문다]비구들이여, 이것을 바른 마음지킴이라 한다(DN.Ⅱ.313)."

마음지킴은 일상의 삶에서도 충분히 활용될 수 있다. 육체적 괴로움이라든가 정신적 슬픔 따위를 견디는 방법으로 이용된 사례가 그러하다. 초기불교 경전에는 마음지킴을 통해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극복하는 경우가 여러 차례 묘사된다(DN.Ⅱ.99쪽, 128쪽 등). 괴로움이나 슬픔따위를 지긋이 주시하다보면 어느 순간 그러한 현상의 허망함을 체득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파생되는 심리적 압박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붓다 자신을 비롯한 여러 제자들은 이 방법을 통해 심리적 괴로움은 물론 육체적 질병 따위에 대처하곤 하였다.

마음지킴을 통해 스스로를 지긋이 응시하다보면 성냄이라든가 질투 혹은 인색 혹은 인색 따위의 부정적 감정들이 완화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마치 봄 햇살에 노출된 눈이 서서히 녹아내리듯이 관찰의 힘에 의해 얼어붙은 마음이 저절로 풀린다.

또한 마음지킴은 매 순간 경험하는 현상들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하여 유연하고 탄력적인 태도로 변화무쌍한 현실과 마주하게 한다. 이것은 내면의 저항감과 부정적 사고를 완화시켜 모든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해준다. 현대의 심리치료에서는 이것을 마음지킴이 수반하는 '노출효과' 그리고 '수용효과'라고 부른다.

마음지킴의 기능은 여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것에 익숙해지면 자신의 감정과 사고에 지배되지 않는 여유로움을 누리게 된다. 육체色·느낌受·지각想·지음行·의식識 따위가 고정적이지 않으며 덧없이 흘러간다는 무상無常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또한 이들 현상이 '나' 자신이 아니며, 이들과 별개로 '나' 라는 존재를 내세울 수도 없다는 무아無我의 진리를 체득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마음지킴은 일체의 현상이 지니는 본래적 특성에 대한 자각을 가져오고, 최종적으로는 사성제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을 가능하게 한다. 



57. 바른 삼매(정정正定)

들뜬 마음 가라앉혀  집중된 상태


바른 삼매란 무엇인가.

팔정도의 마지막 항목으로 산만하거나 들뜬 마음을 가라앉혀 고요히 집중된 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은 바른 마음지킴(정념正念)의 지속적인 실천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 삼매의  경지에 도달하면 혼란스러움이 사라지고 있는 그대로를 꿰뚫어보는 통찰의 능력이 생겨난다. 따라서 삼매는 깨달음이 발생하는 조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경전에서는 이러한 삼매의 상태를 몇몇 단계로 구분한다. 예컨대 네 가지 선정(사선정四禪定)이 그것이다.

"바른 삼매란 무엇인가?…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떠나고, …거친 생각(심尋)과 미세한 생각(사伺)지닌,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첫 번째 선정禪定을 얻어 머문다. 거친 생각과 미세한 생각이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두 번째 선정(제2선第二禪)을 얻어 머문다. 평정(사捨)이 머무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평정과 마음지킴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라고 세 번째 선정(제3선第三禪)을 얻어 머문다.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도 끊어져, …평정을 통해 마음지킴이 청정해진 네 번째 선정(第四禪)을 얻어 머문다. 이것을 바른 삼매라고 한다."

삼매의 체험은 통찰의 지혜를 얻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부정적 정서와 사고를 가라앉혀야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의 경문에서처럼 삼매의 경지는 생각이나 느낌 혹은 호흡 따위의 존속 여부에 따라 네 단계, 여덟 단계, 아홉 단계 등으로 세분화된다.

그러나 초보적 단계인 첫 번째 선정禪定에서도 진리에 대한 통찰은 가능하다(MN Ⅰ. 435~437등). 중요한 것은 삼매의 경지가 높고 낮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그것을 잘 활용하여 통찰의 지혜로 연결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일반적으로 팔정도의 바른 삼매는 네 단계의 선정으로 구성된다. 이들 중에서 네 번째 선정(第四禪)은 갖가지 초월적 능력의 발생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DN.Ⅰ.77~84). 예컨대 타인의 마음의 꿰뚫는 능력(타심통他心通)이라든가, 전생을 기억해내는 능력(숙명통宿命通) 따위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번뇌를 다한 지혜(누진지漏盡智)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강조된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사성제를 깨달아 아는 지혜로 풀이된다(DN.Ⅰ. 100 등). 결국 초기불교의 궁극 목적은 신통력의 성취가 아니라 사성제의 실현을 통해 일체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있다.

삼매의 체험을 언어로써 묘사하기란 적절하지 않다. 두 번째 선정(第二禪)부터는 머릿속의 언어적 움직임(어행語行)자체가 멈추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전의 설명에 비추어 그러한 상태를 짐작해 볼 수는 있다. 호흡이나 느낌 따위에 대한 알아차림이 기민해지면 거친 생각(심尋) 미세한 생각(사伺)으로 이루어지는 언어적 활동은 따라붙기 힘들다. 특히 호흡이 뒤바뀌는 순간이라든가 미세하게 점멸하는 느낌의 양상을 언어적으로 묘사하기란 불가능하다. 언어를 붙이는 순간 이미 또 다른 양상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언어가 개입되지 않은 기민한 알아차림으로 몸과 마음에 대해 깨어있는 상태를 두 번째 선정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언어적 사고가 가라앉으면 더 선명해진 의식으로 현재의 순간에 집중할 수 있다. 감관에 와 닿는 모든 현상들에 대해 더욱 유연한 태도로 깨어있을 수 있게 된다.

특정한 현상에만 집중하여 제한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눈·귀·코 등의 여섯 감관 전체를 열어둘 수 있게 된다. 이때부터는 '내'가 어떤 대상을 임의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대상들이 저절로 '나'에게 드러난다. 다만 깨인 마음으로 안팍으로 드러나는 현상들을 수동적으로 따라가면서 관조하는 듯한 느낌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상태를 '평정을 통해 마음지킴이 청정해진' 네 번째 선정의 경지로 짐작해 볼 수 있다.



58. 삼학과 팔정도

서로 맞물리며 깊어지는 순환적 구조


삼학三學이란 무엇인가.

붓다의 제자로서 닦아야할 3가지 배움의 조목을 가리킨다. 계학(戒學,silasikkha), 정학(定學,samadhisikkha), 혜학(慧學,pannasikkha)이 그것이다. 계학은 입과 몸으로 짓는 악한 행위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밖으로 드러나는 품행을 바르게 하기 위한 과정이다. 정학은 내면의 악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번뇌를 잠재우는 과정에 해당한다.

마지막의 혜학은 계학과 정학을 바탕으로 사성제의 진리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삼학이라는 닦음의 절차를 통해 거룩한 존재ariya로 거듭나게 된다.

삼학은 가장 포괄적인 수행 분류법의 하나이다. 삼학의 체계는 팔정도의 여덟 항목에 비교되곤 한다. 예컨대 바른 언어·바른 행위·바른 삶은 계학에 포함시킬 수 있다. 또한 바른 노력·바른 마음지킴·바른 삼매는 정학에, 바른 견해·바른 의도는 혜학에 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삼학의 배치는 팔정도와 동일한 순서가 아니라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팔정도에서 맨 처음 등장하는 바른 견해와 바른 의도는 삼학에서 맨 마지막 단계인 혜학에 속한다. 따라서 삼학과 팔정도는 지혜의 순서를 놓고서 각기 다르게 설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학의 체계는 계율의 준수로부터 시작하여 마음의 안정을 위한 정학의 단계를 거쳐 진리를 깨닫는 혜학으로 넘어가는 절차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순서는 상식적으로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닦음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팔정도에서 혜학에 해당하는 바른 견해와 바른 의도를 첫 번째 순서로 배대한다. 이것은 삼학과 달리 맨 처음 수행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지혜의 필요성을 부각시킨 것이다. 바른 견해와 바른 의도는 수행의 목적과 절차에 관한 전체적인 조망을 제시한다. 이들이 갖추어질 때 일관된 방향성을 흩트리지 않고 지속적인 닦음을 행해 나갈 수 있다.

팔정도의 바른 견해와 바른 의도는 완성된 닦음을 위한 기본 바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선행하지 않은 닦음이란 모래알을 쪄서 밥을 지으려는 어리석음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지혜를 갖추게 될 때 비로소 참된 닦음의 여정에 바르게 매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른 견해와 바른 의도는 온전한 닦음을 위한 예비적 역할만으로 그 임무가 끝나지 않는다. 이들을 통해 계학과 정학을 잘 닦으면 더 뛰어난 바른 견해를 기대할 수 있다. 이전과는 다른 더욱 수승한 혜학의 차원으로 도약할 수 있게 된다. 바른 지혜가 전제되지 않은 닦음이란 온전한 닦음이라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혜학에 접어들기 이전의 계학과 정학은 불완전하며 방편적으로 제시된 가르침에 지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이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초보적인 단계에서 행해지는 닦음의 절차가 존재해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성에 부응한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설익은 것일지라도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노력과 시도들이 반복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로 이루어진 삼학의 체계는 붓다의 가르침을 맨 처음 접하는 수행자들에게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최초의 계학과 정학은 혜학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또한 혜학은 그 자체로서 머물지 않으며 다시 계학과 정학을 성숙시키는 조건으로 기능한다. 혜학이 무르익게 되면 더욱 원숙해진 모습으로 계학과 정학에 매진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삼학의 조목들은 서로 맞물리면서 깊어지는 순환적인 구조를 취한다.

이와 같은 삼학의 실천적 특징은 바른 견해로 시작되는 팔정도의 가르침을 통해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난다. 이렇듯 삼학과 팔정도는 서로 보완하면서 실천·수행의 여정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돕는다.



59. 사념처

초기불교 대표하는 명상법 


사념처四念處란 무엇인가.

초기불교를 대표하는 명상법의 하나로서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에 대해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사념처cattaro satipatthana라는 명칭을 풀이하자면 '네 가지에 대한 마음지킴의 확립'이 된다. 몸이나 느낌 따위의 4가지를 놓치지 않고 주시함으로써 경험하는 현상들의 본질을 깨닫는 수행을 일컬어 사념처라고 한다. 이것은 팔정도의 일곱 번째 항목인 바른 지킴(정념正念)과 실제적으로 동일한 내용을 지닌다(DN.Ⅱ.313). 또한 이것은 사성제四聖諦의 실현을 최종 목적으로 하며 거기에 이르는 여러 절차를 망라한다.

특히 사념처는 남방의 상좌부불교에서 계승되는 전통적인 명상법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위빠사나Vipassana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일컬어지고 있다. 마음지킴이란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고, 알아차림이란 그러한 상태를 지속하면서 개개의 현상들을 그때그때 명확하게 아는 것이다. 이들을 통해 고요히 집중된 가운데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눈을 떠 나가는 과정이 사념처이다. 여기에는 통찰을 의미하는 위빠사나의 측면과 내면의 고요함을 뜻하는 사마타samatha의 측면이 함께 포함된다. 

사념처에 대해 위빠사나 일변도의 수행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경전에 묘사되는 사념처는 사마타까지 망라하는 포괄적인 내용을 지닌다. 예컨대 느낌에 대한 마음지킴受念處에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정신적인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이 포함된다(DN.Ⅱ.298). 그런데 그러한 느낌이란 일상의 거친 의식 상태에서는 포착되지 않으며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도 끊어진 '네 번째 선정(제사선第四禪)에 이르러야 비로소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사념처의 실천은 고도로 집중된 상태인 사마타의 경지를 포함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념처의 실천이 반드시 사마타를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예컨대 마음에 대한 마음지킴(心念處)에는 내면에 깃든 탐욕이나 분노에 대한 알아차림이 포함된다(DN.Ⅱ.299). 탐욕이라든가 분노 따위는 사마타 혹은 선정의 상태에 이르면 저절로 가라앉는 거친 감정들이다.  따라서 바로 이들에 대해 마음지킴을 유지한다는 것은 사마타에 몰입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몰입의 상태에서는 탐욕 따위가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탐욕이나 분노에 대한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을 내용으로 하는 사념처는 사마타가 아닌 일상적인 의식 상태에서 진행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념처의 4가지에서 맨 마지막의 법에 대한 마음지킴(法念處)은 특수한 성격을 지닌다. 거기에는 다섯 장애(오개五蓋), 오취온五取蘊, 사성제 등에 대한 깨달음이 세부 내용으로 언급된다(DN.Ⅱ.300~314). 이들은 몸·느낌·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을 통해 체득하는 교리적 가르침을 망라한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몸이나 느낌 등에 관련된 현상들이 일어남集과 사라짐(멸滅)을 반복하면서 그 허구성(무아無我)을 드러낼 때 다섯 장애라든가 오취온의 본질을 꿰뚫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의 연장선에서 사성제의 진리를 체득하게 된다. 법에 대한 마음지킴은 수행의 진척과 더불어 알게 되는 내용들을 마음지킴의 대상으로 삼는다.

경전에서는 사념처를 실천함으로써 계율에 대한 태도를 더욱 확고히 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AN.Ⅴ.457~460). 또한 고요함을 가로막는 탐냄 따위의 내면의 장애를 제거할 수 있고, 육체色·느낌受·지각想 따위의 오취온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고, 정신적 성취를 가로막는 갖가지 내면의 족쇄를 제거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이러한 사념처 명상은 출가 수행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재가자들에게도 개방되어 널리 행해졌다고 전해진다(MN.Ⅰ. 340쪽).



60. 몸에 대한 마음지킴

사념처 명상 중 첫 번째에 해당


몸에 대한 마음지킴身念處이란 무엇인가.

몸·느낌·마음·법의 4가지를 대상으로 하는 사념처의 명상에서 첫 번째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몸 혹은 육체적 행위는 가장 쉽게 포착할 수 있는 알아차림의 대상이다.  육체적 현상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주의를 모으고 알아차린 과정을 통해 사성제를 깨우쳐나가는 실천법이 곧 몸에 대한 마음지킴이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사념처의 세부 항목으로 분류하지만 독자적인 명상법으로 권장하는 경우이다.

예컨대 '신 지념경'에는 몸에 대한 마음지킴만으로 궁극의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기술된다(MN.Ⅱ. 88~89). 마음지킴의 대상이 되는 육체적 현상은 다양하다(DN.Ⅱ.291~298). 예컨대 마시고 내쉬는 숨이라든가 구부리거나 펴는 따위의 신체적 동작 따위가 그것이다. 또한 옷을 입거나 음식물을 맛보거나 대소변을 보는 따위의 일상적 행위도 거기에 포함된다. 심지어는 잠에 들거나 깨어나는 순간까지도 마음지킴의 대상들로 언급된다. 이러한 내용은 몸에 관련된 일체의 현상들에 대해 잠시라도 방심하지 말고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몸에 대한 마음지킴에서는 육체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현상을 명상의 매개로 활용한다.

흔히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마음을 닦으라는 메시지로 이해하곤 한다. 몸에 대한 마음지킴 또한 육체적 현상을  대상으로 삼아 깨어 있는 마음을 확립하라는 가르침이다.

​또한 이것은 일상적인 몸가짐과 행동거지를 지속적으로 응시함으로써 스스로를 바로 세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대해 지긋이 지켜볼 수 있다면 그만큼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다. 예컨대 호흡이 거칠 때는 감정적으로도 격앙된 상태이다. 그러한 거친 호흡  상태를 진득하게 알아차리다 보면 자연스레 호흡도 평이해지고 격앙된 감정 또한 가라앉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몸에 대한 마음지킴은 몸과 마음을 함께 다스려 나가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격앙된 상태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게 하여 부지불식간에 저지르기 쉬운 실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이것은 깨어 있는 마음을 유지함으로써 얻게 되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스스로에 대해 강압적으로 억압하라는 의미가 아님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깨인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은 달구어지 쇳덩이가 뜨겁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서 잡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안다면 재빨리 잡았다가 얼른 되놓을 수 있다. 모른다면 덥석 잡고서 한참이 지난 후에야 비명을 지르게 될 것이다. 

몸에 대한 마음지킴에는 일상의 행위만이 아니라 전문적인 명상가들에게 적합한 알아차림의 내용들도 포함된다. 예컨대 몸 안의 내장기관이라든가, 지地·수水·화火·풍風 따위의 4가지 요소(사계四界), 나아가 시체의 부패 과정에 대한

통찰 따위가 그것이다(DN.Ⅱ.293~297). 이들은 일상적인 관찰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으며 상당한 집중력과 상상력을 갖추어야만 인식할 수 있다. 이들은 몸에 대한 마음지킴이 고난도의 전문적 기법까지를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에 대해서는 근기에 따른 다양한 방법이 준비되어 있다는 정도로만 이해해도 무방할 듯하다. 몸에 대한 마음지킴의 방식은 다양하게 설명된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진리를 체득하는 과정은 다음과 일관되게 묘사된다. 

"이와 같이 몸에 관련하여 몸의 현상을 지긋이 관찰하면서 머문다… 혹은 몸에 관련하여 일어나는 현상(집법集法)을… 혹은 사라지는 현상(멸법滅法)을… 혹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집멸법集滅法)을 지긋이 관찰하면서 머문다(DN.Ⅱ.292)" 이러한 내용은 몸에 관련된 현상들이 다만 일시적으로 발생했다가 사라지며, 결국은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이치에 대한 자각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묘사한 것이다.


[출처] 임승택 교수의 초기불교 산책|작성자 제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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