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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초기불교 순례_임승택 교수

임승택 교수의 초기불교순례 41-50

41. 사성제의 의미

완전한 깨달음으로 향하는 실제적 방법

사성제四聖諦란 무엇인가.

괴로움이라는 고귀한 진리(고성제苦聖諦),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고귀한 진리(집성제苦集聖諦), 괴로움움의 소멸이라는 고귀한 진리(고멸성제苦滅聖諦),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이라는 고귀한 진리(고도성제苦道聖諦)의 넷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성제는 초기불교의 궁극적 가르침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붓다의 가르침은 보시(시론施論), 계율戒律, 천상세계(생천론生天論), 사성제四聖諦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그는 이들 각각의 과정을 충분히 마친 사람들에 한해 최종적으로 사성제의 가르침을 펼쳤다.

  사성제를 빨리어Pali로 표현하자면 '4가지 아리야삿짜cattari ariyasaccani'가 된다. 아리야삿짜란 말 그대로 '고귀한 진리' 로 옮길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 아리야삿짜라는 표현은 고苦·집集·멸苦·도道의 사성제를 가리킨다. 붓다는 다양한 가르침을 펼쳤지만 그의 모든 가르침은 결국 사성제로 귀결될 수 있다.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여 긴 세월을 이생 저생으로 치달려 왔나니, 이제 이것을 보아 새로운 존재로의 이끌림을 근절했노라. 괴로움의 뿌리를 잘라버렸나니, 이제 다시 태어남이란 있지 않도다."

  괴로움이란 태어남·병듦·죽음등 인간의 실존에서 피할 수 없는 현상들을 지칭한다. 그런데 이들은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제시되는 괴로움이 아니라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괴로움에 직면한 우리는 "나는 괴롭다", "나는 이 괴로움이 싫다"는 따위의 생각에 발버둥을 친다. 그러나 붓다는 이러한 생각마저 내려놓고서 괴로움을 직시하라고 이른다. 이러한 붓다의 가르침은 다만 "이러한 괴로움이 있다"라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이와 같은 붓다의 진술은 매우 단순하지만 심오한 깊이를 지닌다.

  우리는 괴로움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서 습관적으로 '나'라든가 '너'라든가 혹은 '우리' '따위의 관념을 투사한다. 그 결과 그것의 실체를 정확히 알지도 못한 채 성급히 제거에 나서거나 혹은 애써 도피하려 몸부림친다. 붓다에 따르면 대부분의 중생들은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걷잡을 수 없는 괴로움의 수렁에 빠진다. "나의 이 괴로움은 도대체 언제까지 갈 것인가". "나의 이 지긋지긋한 괴로움을 누구에게 호소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러한 마음상태는 괴로움의 실체를 알 수 없으며, 그것의 원인에 대한 자각과 소멸에 이르는 길로도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괴로움을 '나의 것'으로 개인화하는 경향을 지닌다. 혹은 그것을 '나' 혹은 '나의 자아'로 실체화하곤 한다. 그러나 붓다는 다만 "이러한 괴로움이 있다"라는 사실에 주목하라고 이른다. 섣부르게 괴로움에 맞서는 것은 오히려 괴로움을 증폭시킬 수 있다. 따라서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수용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이러한 태도는 괴로움 자체로부터 그것이 파생시킨 불안과 공포 따위의 부정적 정서를 분리시킨다. 그리하여 갖가지 정서적 ·심리적 뒤엉킴과 부풀림의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이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괴로움에 대해 '나'를 개입시키지 않고 덧없이 흘러가는 현상의 하나로 초연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와 같이 괴로움을 마주해야 하고, 이해해야 하며, 또한 그것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끝마쳐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마침내 괴로움의 원인과 그것의 소멸과 소멸에 이르는 방법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붓다는 이러한 3단계에 이르는 과정을 사성제 각각에 적용시켜 실현한 연후에 비로소 신과 인간들에 대해 '위업는 바른 깨달음(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anuttaram sammsambodhi)'을 선언했다고 한다. 사성제는 언어적 유희 차원에 머무는 사변적·형이상학적 가르침이 아니다. 그것은 타오르는 불길을 멎게 하는 단비와 같이 실제적인 효력을 지닌다.  

 

 

42. 고성제

삶의 방향과 의미를 일깨우는 수단 


고성제苦聖諦란 무엇인가.

고귀한 진리ariyasaccana로서의 괴로움을 가리킨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괴로움이라는 거룩한 진리苦聖諦가 있다. 즉 태어남도 괴로움이요, 늙음도 괴로움이요, 병듦도 괴로움이요, 죽음도 괴로움이요, 슬픔·비탄·괴로움·불쾌함·번민도 괴로움이다. 또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며,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다섯 가지 집착된 경험요소(오취온五聚蘊)가 괴로움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났고 그리고 늙어간다. 태어남 자체에 대해 즐거움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태어남이 자신의 바람이나 의지에 따른 것은 아니라는 데에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늙음·병듦·죽음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우리의 바람과 무관하게 우리를 강제한다. 우리는 떠밀려 태어났고 또한 떠밀려 최후를 맞이한다. 이러한 사실을 직시한다면 태어남과 죽음을 즐거움으로 여길 수 없다. 이들 네 가지 일대사에서 우리의 의지대로 거부하거나 건너 뛸 수 있는 것이란 없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는 괴로움은 또한 어떠한가.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은 즐거움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결코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어디를 가더라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은 피할 수 없다. 관계 속에 살아가는 한 경쟁과 다툼의 위치에 놓이는 사람은 생겨나기 마련이다.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또한 피할 수 없는 이치이다. 사랑의 상실은 외부적 조건의 변화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첫 만남의 야릇한 감정은 종적도 없이 퇴색하고 만다. 사랑의 상실에서 오는 괴로움 역시 피할 수 없다.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는 육체와 정신이 빚어내는 갖가지 갈등 상황에 얽히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붓다는 바로 이것을 보통의 인간이 처한 보편적 실존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바른 인식이 전제될 때 고양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괴로움이란 저마다의 삶에서 각기 다른 무게로 나타난다. 괴로움은 스스로를 돌이켜 보게 만드는 소중한 기회일 수 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의 가장 고유한 차원은 감당하기 어려운 괴로움에 직면하였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일 수 있다. 따라서 괴로움이란 그 자체로서 삶의 방향과 의미를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허황된 바람이나 도피를 꿈꾸지 말아야 하며 괴로움이라는 현상에 대해 솔직한 태도로 마주해야 한다. "이러한 괴로움이 있다"라고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괴로움을 완전히 이해해야 하며parinneyya, 또한 그것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끝마쳐야 한다parinnata. 붓다는 바로 이와 같은 3단계의 과정을 걸친 연후에 비로소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고귀한 진리의 가르침 苦集聖諦으로 넘어간다. 



43. 고성제와 오취온

몸과 경험에 대한 집착은 괴로움으로 연결


오취온五取蘊이란 무엇인가.

물질현상色·느낌受·지각想·지음行·의식識 따위의 경험적 요인에 집착해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이때의 집착이란 번뇌와 동의어로서 이들 오온에 대해 애착과 분노 따위를 품는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해서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뒤엉켜 드러난 5가지 경험요인을 곧 오취온이라고 부른다. '초전법륜경'에서는 바로 이것을 괴로움이라는 거룩한 진리(고성제古聖諦)의 최종 항목에 포함시킨다. 태어남·늙음·병듦·죽음 따위로 인한 괴로움은 실상 이들 다섯의 요인에 붙잡혀 있는 상태에 지나지 않다.

외모에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는 괴로워한다. "나는 왜 이렇게 생겼을까." "부모님은 왜 이렇게 나를 낳으셨을까." 그러나 이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분명한 해답을 줄 수 없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외모에 집착하여 괴로움에 빠져 있는 상태가 지금 그렇게 발생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물질현상에 집착된 상태로서의 색취온色取蘊이다. 최근의 발달된 성형수술은 외모 콤플렉스를 더욱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수술법이 개발되더라도 흐르는 세월마저 막지는 못할 것이다. 외모로 인한 괴로움은 집착의 강도에 비례하여 더욱 거세질 뿐이다.

느낌에 집착된 상태(受取蘊)란 어떠한가. 우리는 누구나 좋은 느낌은 추구하고 좋지 않은 느낌은 배척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이러한 경향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좋은 느낌일수록 빠르게 스쳐가고 좋지 않은 느낌일수록 끈덕지게 따라붙는 듯하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애착과 분노에 더욱 물들어 간다. 애착이란 좋은 느낌에 대한 자동화된 반응이며 분노란 싫어하는 느낌에 대한 저항에 다름이 아니다. 느낌이란 일상의 삶 전체를 주도할 만큼 영향력이  크다. 따라서 이것이 빚어내는 애착과 분노의 파장 또한 크다.

지각이란 특정한 대상을 떠올리면서 이미지화하는 과정이다. 여기에는 개인적인 성향과 취향이 개입되곤 한다. 동일한 현상에 대해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게 반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컨대 개인적인 명예의 실추에서 오는 괴로움에 유달리 민감한 사람들이 있다. 특히 이것은 사회적인 성공을 누렸던 사람들에게 더한 경향이 있다. 스스로의 이미지 손상을 감당하지 못해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마저 없지 않다. 이것은 지각에 집착된 상태(想取蘊)의 비극적 결과이다.

지음에 집착된 상태(行取蘊)란 분노라든가 의심 혹은 혼침 따위의 내면적 충동에 붙잡혀 있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보다는 내적인 동기가 더욱 중요하게 여겨진다. 당장의 분노라든가 들뜸 따위를 삭히지 못해 중요한 일을 그르치는 사례가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스스로 지어낸 내면의 동요에 스스로 희생되는 꼴이다. 이렇듯 자신의 정서와 감정으로부터 초연하지 못하는 한 우리의 삶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휩쓸리기 쉽다. 

의식이란 눈·귀·코 등을 통해 유발된 최초의 원초적 앎을 가리킨다. 이것은 온전한 인식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상태에 해당한다. 예컨대 느낌·지각·지음 따위는 의식에 바탕을 두고서 구체화된다. 그런데 이 의식은 내면의 자아 혹은 영혼으로 오인되곤 한다. 의식에 집착된 상태( 識取蘊)에서는 이러한 오해가 더욱 부풀려진다. "영원불변하는 의식이 있고 바로 이것이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고 윤회한다." 는 생각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사고는 주변의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된 자아관념을 굳어지게 하여 근원적인 이기심을 조장한다. 붓다는 이상과 같이 경험요인들에 집착해 있는 상태를 괴로움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집착의 상태를 벗어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으로 인해 괴로움이 증폭된다는 사실 자체만큼은 분명히 직시해야 한다.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여정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44. 집성제

절박하게 갈구하며 욕구에 이끌리는 상태


집성제集聖諦란 무엇인가. 

괴로움의 원인에 관한 고귀한 진리를 가리킨다. 모든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바로 그 원인을 밝히는 가르침이 사성제의 두 번째 항목인 집성제이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거룩한 진리가 있다. 즉 다른 태어남으로 가는 것이고, 즐기고 탐내는 것이며, 여기저기에 기뻐하는 것인 갈애tanha이다. 예컨대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kama-tanha. 살아있음에 대한 갈애bhava-tanha. 살아있지 않음에 대한 갈애이다vibhava-tanha."

갈애란 마치 타는 목마름으로 물을 구하듯이 어떤 욕구에 강력하게 이끌리는 상태이다. 그와 같이 무언가를 절박하게 갈구하면서 온통 거기에 빠져 있는 경우를 갈애라고 한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원하는 그것 이와의 다른 것을 보지 못한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그것의 획득과 소유에만 골몰하게 된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집착에 빠져 갖가지 존재의 양상에 붙들리게 된다. 이러한 갈애의 제거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물론 우리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적절한 의욕(욕欲, chanda)을 지녀야 한다. 건전한 욕구는 당연히 필요한 것이며 또한 소중히 가꾸어 나가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욕구가 지나치면 오히려 자신과 타인을 해치거나 구속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대부분의 불건전한 존재상황이 이렇게 발생한 갈애로부터 야기된다. 바로 이것을 부추기는 대표적 3가지가 곧 감각적 쾌락·있음·있지 않음이다. 이들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사의 온갖 질곡에 젖어들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 된다.

감각적 쾌락이란 본능적·동물적 욕구에 해당된다. 특히 성적性的 쾌락이 그것이다. 이것에 빠진 사람은 성행위를 탐닉한다. 그리하여 마치 불 속에 뛰어드는 부나비처럼 무모해진다. 그러나 쾌락의 순간은 짧으며 또한 중독성을 지닌다. 우리는 강한 쾌감을 체험할수록 더욱 강한 쾌감을 추구하게 된다. 이것은 결구 반복되는 권태와 좌절감을 남길 뿐이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는 육체를 향한 과도한 집착을 일으킨다. 육체적 현상 자체가 일시적이고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잊게 한다.

있음에 대한 갈애는 어떤한가. 우리는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며 더  나은 무언가를 추구한다.  그런데 사실 명예라든가 물질적 풍요로움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들에 대한 갈망으로 인해 현실을 망각하게 된다는 데 있다. 갖가지 허황된 생각들에 이끌려 스스로를 고립시키거나 왜곡된 방향으로 나가는 경우가 여기에서 비롯된다. 있음에 대한 갈애는 이상적 상태에 경도된 과대 망상적 심리의 일종으로 규정할 수 있다.

살아있지 않음에 대한 갈애는 그러한 과대 망상적 심리가 붕괴되었을 때 나타난다. 이것은 기존에 품고 있던 허황된 생각이 거짓으로 판명될 때 갖게 되는 자기 파괴적 심리이다.

이러한 상태에 빠지게 되면 모든 희망을 단념한 채 오로지 도피만을 꿈꾼다. 일체의 자존감을 상실하고서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살아있지 않음에 대한 열등의식과 자괴감을 내용으로 하며, 스스로를 어디에도 발붙일 곳 없게 만드는 상황으로 몰아간다.

물질현상色·느낌受·지각想·지음行·의식識 따위에 대한 집착을 의미하는 오취온五取蘊이란 갈애에 휘둘린 상태에서 마주하는 경험요인들이다. 이러한 갈애로 인해 우리는 오취온이라는 경험세계의 족쇄에 더욱 강하게 붙들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족이란 결코 얻어지지 않으며 끝없는 불만족과 괴리감에 시달리게 될 뿐이다. 붓다는 이러한 방식으로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자명한 진리를 드러낸다.



45. 집성제와 갈애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타오르는 목마름


왜 갈애가 문제인가.

붓다는 이것으로 인해 집착取이 발생한다고 가르친다. 괴로움의 현실 즉 고성제를 집약 하는 오취온五取蘊이 갈애로부터 이루어진다. 늙음과 죽음으로 귀착되는 불건전한 존재 상황有이 이것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또한 우리는 갈애로 인해 몽둥이를 들게 되고, 칼을 잡게 되며, 다툼·싸움·논쟁·상호비방·중상모략·거짓말 따위와 같은 나쁘고 사악한 행동에 나서게 된다.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부인할 수 없는 것인 까닭에 괴로움의 원인에 관한 거룩한 진리(고집성제苦集聖諦)라고 한다.

갈애의 발생 경로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눈·귀·코 따위의 감관을 통해 특정한 현상에 대한 의식을 갖는다. 즉 감관(근根)과 대상(경境) 의식(식識)이라는 3가지를 통해 구체적인 인식과 경험 활동을 한다. 감관이란 모양과 소리 따위를 인지하는 능력을 가리키며, 대상이란 그러한 능력에 대응하는 개개의 현상을 지칭한다. 한편 의식이란 감관을 통해 그와 같은 현상을 아는 작용이다. 눈의 의식, 귀의 의식, 코의 의식 따위가 그것이다.

이들 3가지 요인이 한데 어우러져 접촉觸이 발생한다. 접촉이란 의식된 현상에 대해 갖게 되는 심리적·정서적 반응이다. 이것으로 주관적 정서가 개입되지 않은 의식에 동요가 발생한다. 따라서 접촉은 개인적인 경험세계가 시작되는 관문에 해당한다. 이것에 뒤이어 즐거움이나 괴로움 따위의 내면적인 느낌受이 발생한다.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느낌이 지니는 지배력은 매우 크다. 우리는 즐거운 느낌을 추구하고 괴로운 느낌을 배척하는 가운데 현실의 삶을 꾸려간다.

갈애는 바로 이 느낌으로부터 발생한다. 살아가는 모습은 실로 다양하지만, 그 이면에는 즐거운 느낌의 추구하는 공통된 목적이 자리한다. 우리는 즐겁고 괴로운 느낌이 교차하는 가운데 갖가지 내면의 갈증을 증폭시키곤 한다.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닉은 타오르는 목마름으로 바뀌어 원하는 것에 오로지 골몰하게 만든다. 바로 이것을 갈애라고 부른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이로 인해 갖가지 부적절한 존재상황에 빠진다.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갈애는 제거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괴로움을 종식시킬 수 있다.  사성제의 집성제 이후 과정은 바로 이것을 내용으로 한다.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는 제거해야 하며 또한 완전히 제거해 마쳐야 한다" 라든가, "괴로움의 소멸은 실현해야 하며 또한 완전히 실현하여 마쳐야 한다"라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이 과정은 명상을 통한 지혜의 개발과 더불어 올바른 실천적 삶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가르치는 해탈·열반의 경지란 다름 아닌 갈애의 소멸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갈애란 일단 발생하고 나면 그것에 대해 맞서거나 저항하기가 무척 힘들다. 갈애에 빠진 상태에서는 탈출구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모든 것이 이미 갈애에 중독된 상태로 작동하는 까닭이다. 그러한 상황에처하면 갈애를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마저 갈애의 영향 아래에 있게 된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출구를 찾아야 하는가. 경전에서는 갈애로부터 벗어나는 실마리를 그것의 원인인 느낌에서 찾는다. 즉 느낌에 대해 청정한 마음을 일으켜 쉬거나 멈추게 하면 갈애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즐거운 느낌에서 유래하는 탐냄의 잠재적 경향을 가라앉히고, 괴로운 느낌에서 유래하는 분노의 잠재적 경향을 가라앉히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서 유래하는 무지의 잠재적 경향을 가라앉힌다. 비구들이여, 그러한 비구는 탐냄의 잠재적 경향을 가라앉힌 '바르게 관찰하는 이'로서 갈애를 없앤다.

속박으로부터 벗어난다. 아만을 완전히 그쳐 괴로움의 끝에 도달한다. "이렇듯 초기불교의 실천·수행에서 느낌에 대한 올바른 대처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결국 갖가지 느낌에 물들지 않음으로써 갈애의 발생을 막는 것이야말로 초기불교 수행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46. 멸성제

갈애 소멸을 위한 실천과 수행의 지표


멸성제滅聖諦란 무엇인가.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고귀한 진리를 가리킨다. 갈애愛를 제거하면 괴로움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전하는 가르침이다. 멸성제는 초기불교의 궁극 목적을 드러내는 것으로 열반涅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닫고 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해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거룩한 진리(고멸성제苦滅聖諦)가 있다. 즉 갈애의 남김 없는 소멸·포기·버림·벗어남·집착 없음이다."

멸성제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 경지가 있음을 알려준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괴로움이 그친 이상적인 세계를 생각해보게 된다. 또한 그러한 경지를 스스로 실현하여 머물겠노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멸성제는 우리 자신이 갈애의 속박에 무력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의 원인인 느낌에 대해서도 적절히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멸성제는 실천·수행의 지표로서의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것으로 우리는 괴로움이라는 어두움 속에서 한 줄기 밝은 빛을 만나는 셈이다.

멸성제는 갈애의 소멸 혹은 포기를 내용으로 한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그만큼 갈애는 막강한 지배력을 지니며 억누를수록 강해지는 특성마저 지닌다. 갈애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의 원인이 되는 느낌에 주목해야 한다. 갈애란 갖가지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을 자양분으로 삼아 자라난다. 그러므로 느낌을 잘 대처하여 그것에 물들지 않는다면 갈애의 속박을 방지하거나 약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느낌의 유혹 또한 결코 만만치 않다. 우리는 즐거운 느낌 앞에서 마치 꿀통에 빠져드는 파리처럼 무력해진다. 아무리 잊으려고 애써도 한 번 경험한 그 맛을 떨칠 수 없다. 잊으려는 몸부림마저 그쪽으로 다가서기 위한 술책이 되고 만다. 그러한 우리에게 느낌의 유혹을 종식시킬 수 있는 확실한 대안은 깨달음이다. 자신을 유혹하는 느낌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는 것이다. 따라서 멸성제의 실현에는 기존의 낡은 인식과 사고를 벗어나기 위한 관점의 전환이 요구된다.

깨달음을 통해 느낌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는 구체적인 사례는 어떠한가. 어젯밤에 마신 시원하고 달콤했던 물이 해골에 담긴 빗물이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이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해골에 남겨진 물의 느낌은 더 이상 유혹거리가 되지못한다. 남녀간의 사랑으로 비유를 바꾸어보자. 야릇한 감정이 막 피어날 무렵 어렸을 적 헤어졌던 친남매간이라는 사실으 알게 된다면 어떨까. 모르는 상태에서라면 누가 억지로 말리더라도 그러한 감정이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알게 된다면 이성적인 사랑의 감정은 저절로 누그러질 것이다.

이렇듯 갈애를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깨달음 혹은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깨달음은 느낌의 유혹과 갈애의 속박을 제거시킬 수 있는 실제적인 힘을 지닌다. 이러한 절차 없이 막구가내로 갈애를 없애려 시도하는 것은 엄청난 의지를 필요로 한다. 경전에서는 그러한 방식도 인정하여 '갈애를 통한 갈애의 제거'를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방법은 실천·수행의 여정을 어렵고 험난한 것으로 여겨지게 만들 수 있다.

이점을 고려하면 깨달음과 더불어 원만하게 실현되는 멸성제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크건 작건 깨달음이란 붓다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 데 필수적이다. 아래의 경문은 이상의 과정을 잘 집약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사랑스러운 대상, 유쾌한 대상에 대해 무상으로 본다. 괴로움으로 본다. 무아로 본다. 질병으로 본다. 두려움으로 본다. 그리하면 갈애는 제거된다. 갈애가 제거되면 집착이 제거되고, 집착이 제거되면 괴로움도 제거된다. 괴로움이 제거되면 태어남·늙음·죽음·비탄·괴로움·불쾌함·번민으로부터 벗어난다."



47. 멸성제와 열반

스스로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실현되는 경지

 

열반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을 완성한 경지를 가리킨다. 혹은 깨달음의 완성을 통해 더 이상 번뇌가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열반이란 초기불교의 최종 목표로서 사성제의 구조에배치하면 멸성제에 해당한다. 이와 관련하여 경전에서는 "갈애의 소멸이 열반이다"라든가, "갈애를 버리는 것이 열반이다" 라고 말한다. 이렇듯 열반이란 '갈애의 남김 없는 소멸·포기·버림'을 내용으로 하는 멸성제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멸성제와 열반은 정서적·심리적 차원의 가르침으로 제시된다. 결국 실천·수행의 관건은 어떻게 해서 그러한 심리적·정서적 안정을 얻느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을 성취한 붓다가 맨 처음 읊었던 것으로도 유명한 경구 또한 그것을 나타낸다. "욕망과 분노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가르침을 깨닫기 어렵다. 흐름을 거슬러가고 오묘하고 심오하고 미세한 이것을 보기 어렵다. 어둠에 싸여 욕망에 물든 자들은 보지 못한다." 따라서 내면의 번뇌를 다스리는 일이야말로 깨달음에 우선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에서 깨달음 혹은 지혜의 성취는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명상의 실천을 통해 잠시 마음을 평온하게 할 수 있다. 수개월 혹은 수년의 집중수행은 번뇌로부터 정화된 느낌을 갖게 해줄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음 혹은 지혜가 뒷받침되지 않은명상은 오래지 않아 흐트러지고 만다. 예컨대 현실로 되돌아 와 가족 구성원끼리 부딪히는 와중에 생겨나는 문제라든가 사회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갈등에 휩쓸리는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평정심을 지속하면서 올바로 대처해 나가기 위해서는 지혜의 성취가 반드시 필요하다.

지혜 혹은 반야는 그 자체로서 마음의 번뇌를 정화하는 능력을 지닌다. 이와 관련하여 경전에서는 "욕심 따위는 몸이나 말로써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지혜로써 관찰하고 관찰하여 버려야만 한다" 라고 기술한다. 예컨대 형제간의 갈등으로 빚어지는 번뇌는 일방적인 주장과 노력만으로는 해결이 곤란한 경우가  많다. 그때에는 당사자 모두의 시각을 벗어나 부모님의 입장에서 문제를 반조해 보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완전한 해결책이 일시에 보장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최소한 파국의 상황으로 치닫는 것은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붓다는 "지혜로써 보고 나면 번뇌가 완전히 소멸한다" 라고 가르치며, 또한 "지혜로써 바르게 닦인 마음은 모든 번뇌로부터 바르게 해탈한다" 라고도 언급한다. 이러한 경구들은 지혜의 개발이 심리적·정서적 안정을 얻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따라서 지혜를 통해 정서적으로 안정을 확고히 하고, 또한 역으로 정서적 안정을 통해 깨달음의 계기를 마련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듯 초기불교의 실천·수행에서 정서적 안정과 지혜의 계발은 서로를 의존하여 더욱 깊어져가는 관계에 놓인다. 간혹 열반의 경지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상태로 이상화되곤 한다.

그러한 이해에 따르면 열반이란 '축복이 넘치는 불생불멸의 상태' 혹은 '태어남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이상적 경지'이다. 그러나 초기불교 경전에서 멸성제에 대한 일반적인 서술은 갈애의 소멸을 언급하는 것으로 엄격히 제한된다. 또한 많은 경우 열반에 대한 묘사 역시 탐냄이라든가 분노 따위가 소멸된 경지로만 나타난다. 이것은 멸성제 혹은 열반에 대한 우상화를 막고 현실의 삶에서 그것을 직접 실현하라는 의도로 이해된다.

다음의 가르침이 전형적인 경우이다. "열반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탐냄의 소멸·성냄의 소멸·어리석음의 소멸, 바로 그것이 어리석음이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열반이란 감정적·심리적 동요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능력에 다름이 아니다. 따라서 열반이란 일상의 삶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스리고 추스르는 와중에 실현되는 경지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48. 도성제

괴로움 소멸하는 거룩한 진리


도성제道聖諦란 무엇인가.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에 관한 고귀한 진리를 가리킨다. 괴로움이 소멸된 경지란 열반을 의미하며 혹은 깨달음의 완성으로도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도성제는 바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성제의 최종 위치에 놓인다. 괴로움에 대한 인식(고성제苦聖諦)으로부터 출발한 사성제는 마지막으로 그것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이와 같이 사성제는 도성제라는 실천적 과제를 제시함으로써 그 막을 내린다.

경전에서는 도성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거룩한 진리(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가 있다. 즉 거룩한 여덟 가지 길로서, 바른 견해·바른 의도·바른 언어·바른 행위·바른 삶·바른 노력·바른 마음지킴·바른 삼매이다(SN.V. 421~422)" 따라서 도성제의 실제 내용은 팔정도八正道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팔정도를 통해 사성제를 완성하게 된다.

팔정도는 중도(中道, majjhima paptipada)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감각적 쾌락에 빠져 즐거움에 몰두하는  것은 천한 짓이고, 하찮은 짓이고, 범속한 짓이고, 거룩하지 못한 짓으로, 유익하지 못하다. 또한 자신을 괴롭히는 데에 몰두하는 것은 고통스럽고, 거룩하지 못한 짓으로, 유익하지 못하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들 두 극단을 가까이 하지 않고 중도를 깨달았느니,…그것은 다름 아닌 거룩한 여덟 가지의 길이다(SN.V. 421)" 이처럼 중도란 쾌락과 고행이라는 두 갈래의 극단적인 실천방식을 벗어난 팔정도를 가리킨다.

따라서 도성제와 중도의 실제 내용은 팔정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전법륜경'에서는 도성제를 구성하는 팔정도와 중도로서의 팔정도를 따로 언급한다(SN.V. 421). 중도로서의 팔정도는 사성제를 실천해 나가기 위한 예비적 가르침으로서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도성제로서의 팔정도는 사성제의 맨 마지막 내용에 해당된다.

이것은 사성제의 실천을 갈무리하는 차원에서 행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중도로 표현되는 팔정도의 실천은 거문고의 줄에  비유할 수 있다. 예컨대 거문고의 줄은 지나치게 팽팽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느슨하지도 않을 때 비로소 아름다운 선율을 기대할 수 있다(AN.ⅱⅰ.375). 

그러하듯이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한 닦음 또한 쾌락에도 빠지지 않고 고행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 실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도성제를 구성하는 팔정도는 사성제의 최종 단계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고성제와 집성제 그리고 멸성제를 순차적으로 실현한 연후에 닦는 것으로 이미 완성에 이른 수행이다.

한편 후대에 이르러 중도하는 표현은 연기緣起의 원리와 결부된다. 그리하여 중도연기中道緣起라는 새로운 술어가 등장하기도 한다. 중도연기에 따르면 모든 현상은 타자他者에 의존하여 존재하므로 낱낱의 독자성만을 강조해서는 안된다.

존재 일반의 ​상호의존적 특성을 분명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낱낱의 독존적 측면에 매몰되지 않는 중간자적, 초월적 시각이 요구되다. 우리는 이러한 중도적 시각 아래 개개의 현상이 지닌 독특성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 이러한 중도 해석은 대승불교에 이르러 삼라만상의 근본원리를 드러내기 위한 가르침으로까지 확대된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경전에 한정하자면 중도연기의 직접적인 용례는 등장하지 않는다. 중도의 쓰임은 예외 없이 팔정도에 관련되며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방법과 태도를 가리킬 뿐이다. 붓다는 세계의 근본을 규명하려는 이론적 작업보다 현실의 삶 자체에 더욱 관심을 두었다. 그는 사변적 견해의 소유 여부에 상관없이 시시각각 와닿는 괴로움의 현실에 주목하라고 일렀다. 중도로서의 팔정도는 괴로움의 제거하기 위한 실천적 태도를 의미한다. 이것에 대해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것은 자칫 팔정도의 실천을 관념화, 사변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49. 팔정도와 돈오점수頓悟漸修

 사성제 순서에는 돈오점수 원리 담겨


팔정도八正道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도성제를 이루는 여덟의 바른 방법을 가리킨다. 곧 바른견해·바른의도·바른언어·바른행위·바른삶·바른노력·바른마음지킴·바른삼매를 일컫는다. 붓다는 고성제를  통해 괴로움의 현실을, 집성제를 통해 그 원인을, 멸성제를 통해 괴로움이 소멸된 경지를, 도성제를 통해 구체적인 실천양상을 밝혔다. 이 사성제의 가르침에서 팔정도는 맨 마지막의 도성제를 구성한다.

  사성제의 순서와 관련하여 일부 이견이 존재한다. 두 번째의 집성제는 첫 번째의 고성제에 대해 그 원인이 되고, 네 번째의 도성제는 세 번째의 멸성제에 대해 그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집성제가 먼저이고 고성제는 나중이며 또한 도성제가 먼저이고 멸성제는 나중의 것이 된다. 사실 괴로움은 갈애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의 경지는 닦음을 통해 얻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사성제의 순서는 집성제로부터 고성제로, 도성제로부터 멸성제로 나가는 형식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성제의 실천에 관한 초기불교의 전형적인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누각의 아래층을 짓지 않고서 위층을 짓겠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그러하듯이 비구들이여, 고성제를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알지 못하고서,… 집성제를, 멸성제를, 도성제를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알지 못하고서, 괴로움을 바르게 종식시키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SN.V. 420 이하). 흔히 '위없는 바른 깨달음(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anuttaram. samma-sam. bodhi)' 혹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多羅三三菩提'로 표현되는 붓다 자신의 깨달음은 이러한 순서에 입각해 있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사성제의 실천 순서야말로 초기불교의 정설이라고 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보자면 팔정도를 통해 멸성제의 실현으로 나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실제로 일부 경전에서는 도성제를 닦고서 멸성제로 나간다는 뉘앙스의 언급을 하기도 한다(MN.ⅱⅰ.289). 그러나 초기불교의 일관된 입장은 멸성제를 실현한 연후에 도성제로 나간다는 것이다. 이점은 매우 신중한 검토를 필요로 하며, 또한  팔정도의 위상에 관해 중대한 사실을 일깨운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팔정도가 깨달음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깨달음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도성제의 팔정도가 사성제의 최후에 등장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바른 견해·바른 의도 등으로 구성된 팔정도는 탐냄이라든가 성냄 따위에 매이지 않는 상태에서만 온전하게 수행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어리석음을 벗어난 경지에서라야 비로소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후대의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이것을 두고

"깨달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참된 닦음이란 있을 수 없다"라고 표현하였다.

혹은 "몰록 깨달음을 얻고서 차례로 닦아 나간다"라는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내세우기도 하였다. 사성제의 순서에는 이러한 원리가 절묘하게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멸성제의 실현을 통해 비로소 팔정도의 거룩한 닦음으로 나갈 수 있다. 이것은 초기불교 경전에 나타나는 확립된 순서이다. 멸성제가 전제 되지 않은 팔정도는 뿌리를 제거하지 않은 채 돌로 풀을 덮어 누르는 것과 같은 억압적 행위일 수 있다.

  한편 멸성제를 실현한 연후에 행하는 팔정도란 이미 번뇌로부터 벗어난 상태에서 행하는 닦음이다. 이것은 범부의 차원을 넘어선 것으로 '닦음이 아닌 닦음(수이무수修而無修)' 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0. 바른 견해(정견正見)

진리의 완성에 이르는 첫 걸음


바른견해란 무엇인가.

팔정도의 첫 번째 항목으로서 붓다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보고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바른 견해는 팔정도의 출발점이 되는 동시에 이후의 다른 항목들에 대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철저하지 못하면 나머지 항목의 닦음 역시 온전할 수 없다.

따라서 팔정도는 바른  견해를 갖추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도성제의 첫 번째 항목인 이것으로부터 사성제의 진리는 완성에 이른다. '다사십경'에서는 바른 견해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 가르침 안에서 선행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바른 견해가 어떻게 선행하는가. 비구들이여, 바른 견해를 조건으로 삿된 견해가 소멸하고, 또한 삿된 견해를 조건으로 생겨나는 무수한 사아가하고 불건전한 상태가 소멸한다(MN.ⅰⅱ.76-77)"

이렇듯 올바른 견해를 갖추는 것은 실천·수행 수행의 영역에서 절대적이다. 이것은 깨달음을 강조하는 불교라는 종교의 본래적 특징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경전에서는 바른 견해의 성격에 따라 팔정도의 차원이 달라지는 것으로 설명한다. 세간적인 바른 견해와 출세간적인 바른 견해가 그것이다. 전자를 확립한 사람은 바른 안목으로 많은 공덕으로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지만 번뇌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이것의 사례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보시의 공덕이 있고, 제사의 공덕이 있고, 공양의 공덕이 있고, 선악의 공덕이 있고, 선악의 과보가 있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이 있다.…'라고 본다면, 그것은 공덕은 있으되 번뇌가 남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바른 견해이다.(MN. ⅲ72)."

세간적인 바른 견해는 출세간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을 갖춘 사람은 사회의 모범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웃에게 베풀고 스승을 공경하는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 한편 출세간간의 바른 견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거룩한 바른 도를 닦는 자에게 반야(혜慧),…법에 대한 분별이라는 깨달음의 요소(택법각지擇法覺支), 바른견해(정견正見)라는 거룩한 팔정도의 요소가 생겨난다.

"비구들이여, 바로 이것을 거룩하고 번뇌가 없는 출세간의 도의 요소에 해당하는 바른견해라고 한다(MN. ⅲ72)."

세속적인 팔정도가 되느냐 혹은 출세간의 팔정도가 되느냐의 문제는 최초의 바른 견해에 달려있다. 세속적인 팔정도가 되느냐 혹은 출세간의 팔정도가 되느냐의 문제는 최초의 바른 견해에 달려있다. 세속적인 팔정도는 재가자들에게 건전한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멸성제 혹은 열반을 실현한 이들이 닦는 거룩한 팔정도와는 성격이 다르다. 한편 출세간의 거룩한 바른 견해는 사성제의 진리를 꿰뚫는 지혜로도 바꾸어 말할 수 있다.(DN.ⅱ.311-312).  

이것의 확립은 나머지 팔정도의 실천을 출세간의 차원으로 이끈다. 출세간의 바른 견해는 그 자체로서 완성된 닦음의 실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의 경구 또한 동일한 맥락이다. "비구들이여, 무명(無明,avijja) 이 선행하면 불건전한 상태에 도달하여 부끄러움도 없고 창피함도 없게 된다. 비구들이여, 무명에 빠진 무지한 자에게는 삿된 견해가 생겨난다.… 삿된 삼매가 생겨난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앎(明,vijja)이 선행하면 건전한 상태에 도달하여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알게 된다.

"비구들이여, 앎을 지닌 자에게 바른 견해가 생겨난다.​… 바른 의도, 바른 언어, 바른행위,​… 바른 삼매가 생겨난다(SN.V.1-2)."

세간적인 바른 견해는 출세간의 바른 견해로 나아가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간극이 자리한다. 세간적인 바른 견해를 유지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반면에 도성제에 속한  출세간의 바른 견해는 무명의 타파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며, 또한 멸성제를 이미 실현한 연후에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한 닦음은 번뇌라는 잡초의 뿌리를 뽑고서 행하는 것으로 '닦음이 아닌 닦음'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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