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차려야 ‘현재’를 살 수 있다.
비구들이여, 다시 비구는 걸어가면서 ‘나는 걷는다’고 분명하게 안다. 서 있을 때는 ‘나는 서 있다’고 분명하게 안다. 앉아 있을 때는 ‘나는 앉아 있다’고 분명하게 안다. 또 누워 있을 때는 ‘나는 누워있다’고 분명하게 안다. 이와 같이 그는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든지 그는 분명하게 안다.
『염처경』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는 알아차림(sati) 이라는 용어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렇다. 알아차림은 언제나 현재와 관련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의식하는 것은 오직 현재일 수밖에 없다. 과거란 이미 지나간 현재의 흔적이고, 미래란 아직 오지 않는 현재의 기획들이다. 나의 경험은 결국 현재에 한정된다. 현재란 결국은 호흡이든지 몸의 움직임이나 느낌이나 마음이든지 감각기관에 부딪치는 감각대상을 의미한다.
『염처경』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는 알아차림(sati) 이라는 용어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렇다. 알아차림은 언제나 현재와 관련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의식하는 것은 오직 현재일 수밖에 없다. 과거란 이미 지나간 현재의 흔적이고, 미래란 아직 오지 않는 현재의 기획들이다. 나의 경험은 결국 현재에 한정된다. 현재란 결국은 호흡이든지 몸의 움직임이나 느낌이나 마음이든지 감각기관에 부딪치는 감각대상을 의미한다.
그래서 붓다는 일체란 눈, 코 등의 감각기관과 그것에 상응된 감각대상, 색깔이나 냄새 따위라고 말한다. 우리는 다만 지금 여기만을 살 수가 있다.
알아차림이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지점은 바로 현재라는 것이다. 지나간 과거를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사건을 회상하고, 못 잊어하는 경향이 있고, 나아가서는 과거로 인하여 현재를 희생시키는 경우도 있다. 또한 우리는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희생을 강요하기도 한다. 하지만 깨달음은 언제나 현재이다. 이 영원한 현재는 과거형도 미래형도 아니다. 그것은 지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순간들이다. 행동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현재에서 가능하다는 말이다.
알아차림이 중요한 세 번째 이유는 알아차림이 자기를 실현하는 통로가 된다는 점이다. ‘자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자각하는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인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몸, 호흡, 느낌, 생각, 마음 등을 분명하게 자각하여 아는 일이다.
이를테면 고소나물의 경우를 들어보자. 봄철이면 들판에 많은 나물들이 자란다. 고소는 자신의 향기를 속이지 못하고 자신의 향기를 힘껏 발산한다. 장미꽃은 장미꽃으로, 철쭉은 철쭉꽃으로 자신의 본성을 마음 껏 드러낸다.
자기실현은 자신을 알아차림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어떤 사람이 자기를 실현한 사람일까? 이점은 초기경전 뿐 아니라, 대승불교의 핵심 과제였다. 우리는 얼마나 자기를 실현하면서 살고 있을까? 아마도 대답하기가 매우 곤란할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견성성불(見性成佛)이란 말이 있다. 성품을 보아서 부처를 이룬다. 성품이란 말할 필요도 없이 자기의 본성이다. 부처란 완전한 사람, 자기실현을 상징한다. 자기의 본성을 보면,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신의 본래적인 작용을 자각하면 부처와 같은 완전한 실현을 이룬다는 모토이다.
무엇이 자신의 성품은 무엇일까? 그동안 우리는 이 용어에 대해서, 너무 철학자와 같은 태도를 취하거나, 형이상학적인 입장을 취했다. 설명하고 이해하려 했다. 도란 지극히 쉽다. 다만 보고 보기만 할 뿐, 귀로 들을 때 듣기만 할 뿐, 이것이 우리의 성품이다. 부처는 부처이고, 나는 나이다. 다만 현재에서 작용하는 것이 성품이고, 우리의 본질이다. 과거나 미래에 대한 생각은 그곳엔 자리를 잡을 수가 없다.
부처란 무엇인가? 밥 먹고, 발우를 씻는 행위, 그 이상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밥을 먹을 때 밥 먹는 일에 접촉하지 못하고, 다른 기억과 계획들로 현재를 망각하고, 은폐한다. 이때 우리는 귀 먹고 눈 봉사가 된다. 늘 도(道), 현재(現在)는 우리와 함께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복잡하게 멀리 와서는, 여기에 인위적으로 집중하지 않으면, 망각의 강으로 흘러 들어가 폭류에 휩쓸린다.
알아차림이란 지금 여기, 현재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재를 살 수가 있는가? 그것은 실로 단순하다. 그것은 몸, 감각에 집중하는 일이다. 이런 것과 어울리는 삶의 방식은 노동이다. 하지만 현대 산업사회는 노동을 상품화했고, 명상과 인간의 본성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몸으로 행동하는 일을 우리는 싫어한다. 현대 자본사회의 불행은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이 자동화되고, 우리의 삶은 점점 기호화된다. 몸은 욕망이 되었고, 반대로 상징이 우리 몸이 되었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현재에 감각에 집중하는 명상은 더욱 전망이 밝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문제를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신뢰할만 하기 때문이다.
알아차림이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지점은 바로 현재라는 것이다. 지나간 과거를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사건을 회상하고, 못 잊어하는 경향이 있고, 나아가서는 과거로 인하여 현재를 희생시키는 경우도 있다. 또한 우리는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희생을 강요하기도 한다. 하지만 깨달음은 언제나 현재이다. 이 영원한 현재는 과거형도 미래형도 아니다. 그것은 지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순간들이다. 행동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현재에서 가능하다는 말이다.
알아차림이 중요한 세 번째 이유는 알아차림이 자기를 실현하는 통로가 된다는 점이다. ‘자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자각하는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인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몸, 호흡, 느낌, 생각, 마음 등을 분명하게 자각하여 아는 일이다.
이를테면 고소나물의 경우를 들어보자. 봄철이면 들판에 많은 나물들이 자란다. 고소는 자신의 향기를 속이지 못하고 자신의 향기를 힘껏 발산한다. 장미꽃은 장미꽃으로, 철쭉은 철쭉꽃으로 자신의 본성을 마음 껏 드러낸다.
자기실현은 자신을 알아차림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어떤 사람이 자기를 실현한 사람일까? 이점은 초기경전 뿐 아니라, 대승불교의 핵심 과제였다. 우리는 얼마나 자기를 실현하면서 살고 있을까? 아마도 대답하기가 매우 곤란할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견성성불(見性成佛)이란 말이 있다. 성품을 보아서 부처를 이룬다. 성품이란 말할 필요도 없이 자기의 본성이다. 부처란 완전한 사람, 자기실현을 상징한다. 자기의 본성을 보면,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신의 본래적인 작용을 자각하면 부처와 같은 완전한 실현을 이룬다는 모토이다.
무엇이 자신의 성품은 무엇일까? 그동안 우리는 이 용어에 대해서, 너무 철학자와 같은 태도를 취하거나, 형이상학적인 입장을 취했다. 설명하고 이해하려 했다. 도란 지극히 쉽다. 다만 보고 보기만 할 뿐, 귀로 들을 때 듣기만 할 뿐, 이것이 우리의 성품이다. 부처는 부처이고, 나는 나이다. 다만 현재에서 작용하는 것이 성품이고, 우리의 본질이다. 과거나 미래에 대한 생각은 그곳엔 자리를 잡을 수가 없다.
부처란 무엇인가? 밥 먹고, 발우를 씻는 행위, 그 이상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밥을 먹을 때 밥 먹는 일에 접촉하지 못하고, 다른 기억과 계획들로 현재를 망각하고, 은폐한다. 이때 우리는 귀 먹고 눈 봉사가 된다. 늘 도(道), 현재(現在)는 우리와 함께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복잡하게 멀리 와서는, 여기에 인위적으로 집중하지 않으면, 망각의 강으로 흘러 들어가 폭류에 휩쓸린다.
알아차림이란 지금 여기, 현재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재를 살 수가 있는가? 그것은 실로 단순하다. 그것은 몸, 감각에 집중하는 일이다. 이런 것과 어울리는 삶의 방식은 노동이다. 하지만 현대 산업사회는 노동을 상품화했고, 명상과 인간의 본성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몸으로 행동하는 일을 우리는 싫어한다. 현대 자본사회의 불행은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이 자동화되고, 우리의 삶은 점점 기호화된다. 몸은 욕망이 되었고, 반대로 상징이 우리 몸이 되었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현재에 감각에 집중하는 명상은 더욱 전망이 밝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문제를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신뢰할만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