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빠나사띠(호흡관)를 이용한 지관겸수止觀兼修 방식의 사념처 수행
- 붓다의 수행을 따라서 수행하는 nswsam님의 글 中에서 (일부 수정보완)
대반열반경에 보면 부처님 입멸 소식을 들은 대부분의 비구들은 하나같이 슬퍼했지만, 무리 가운데 늦게 출가한 스밧다라는 비구가 있었는데, 그는 슬퍼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만두시오. 여러분! 그렇게 울며 슬퍼할 것 없소. 저 대사문(붓다)은 지금까지 ‘이것은 해야만 한다,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잔소리가 매우 심했소. 그러나 이제부터 우리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할 수 있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을 수 있소. 당연히 기뻐해야만 할 일이 아니겠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수행이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의 수준을 요구하는 수행인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라한은 탐진치를 끊은 성자聖子가 아닙니까? 아무나 성자라고 부르지는 않지요. 범부의 수준을 초월해서 마음이 청정해진 것은 ‘결벽증의 정도’가 아니라 이미 세속적인 경지를 뛰어넘은 것입니다. 위의 스밧다 같은 비구가 붓다 당시의 승단에도 있었으니, 붓다 사후 승단이 분열하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하지만, 실제 수행의 관점에서는 이 결벽증에 가까운 수준은 현실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이 사념처 수행의 유일한 단점은,
“사념처 수행을 쉬지 않고 행하면 몸이 피로해지고, 몸이 피로해지면 마음은 다시 산란해 진다”고 붓다께서는 말씀하십니다<맛지마 니까야 MN19>.
그래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붓다께서는 사마디(삼매)가 필요하다고 하시지요. 즉, 사마디는 몸을 편안하게 하고 마음을 다시 활기차고 유능하고 산란하지 않도록 하는 작업인데, 초선부터 사선까지 네 가지 선정(선정 삼매)으로 이를 설(설명)하십니다.
.
이제 여기서 본격적인 선정의 논의를 해 보도록 하지요. 우선, ‘선정이 왜 필요하냐’는 것부터 얘기해 봅시다.
붓다께서 앞서 <MN19>에서 사념처 수행을 쉬지 않고 행하면 몸이 고단해지고, 몸이 고단하면 마음은 산란해진다고 말씀하신 대목이 핵심입니다. 쉽게 말해, 붓다의 수행은
‘불선함과 관련된 마음작용'(위딱까; 예컨대 탐진치의 생각, 집착의 생각, 산만한 생각, 망상..)들을 정화하는 '선함과 관련된 마음작용'(위짜라; 예컨대 숙고, 탐진치의 생각을 살피고 반성하고 놓아버림, 집착을 놓아버림, 망상을 놓아버림..)’을 끊임없이 일으키는 것입니다‘
즉 끊임없이 위딱까-위짜라를 하여 팔정도의 ‘네 가지 바른 노력’을 닦아서 마침내 오장애가 제거되면 몸과 마음이 행복해지고 초선에 도달합니다. 초선까지는 여전히 위딱까-위짜라가 함께하지만, 이선 이후로는 위딱까-위짜라 조차도 고요해지고 이후 삼선정 및 사선정까지 거쳐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위딱까(vitakka)와 위짜라(vicāra)라는 용어의 뜻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붓다의 설법(법을 설명함)에서 위딱까(vitakka)는 불선함과 관련된 마음작용(ex; 탐진치의 생각, 산만한 생각, 망상, 집착 등)을 의미합니다.
한문(중국어) 경전에서는 위딱까(vitakka)를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尋(찾을 심; 1. 찾다 2. 생각하다 3. 잇다 4. 첨가하다), 탐구(尋求; 찾다, 구하다, 탐색하다, 탐구하다), 각(覚; 1. 감각 2. 느끼다 3. 드러나다), 사유(思惟; 생각하다); vitakka-vicāra 尋-伺, 각-관(覚-観; 대체적으로 생각하는 일 - 세밀하게 관찰하는 일)
영어 경전에서는 위딱까(vitakka)를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reflection(마음의 거울에 비친 상); thought, thinking, 'discursive thinking(산만한/두서없는 생각)'; ‘initial application (like the' hand holding', comparing vitakka with vicāra, 위짜라와 비교해서 움켜쥐는 작용)’; ‘vitakka is the directing of concomitant properties towards the object; vicāra is the continued exercise of the mind on that object, 대상으로 향하는 마음 작용; 대상 위에 머무는 마음 작용 (이 두 가지는 초선정의 특성이다, 그러나 이선정에서 이 둘은 사라진다. 초선정에서 대상은 지복이다. Both are properties of the first jhāna, but are discarded in the second jhāna)’
붓다의 설법(법을 설명함)에서 위짜라(vicāra)는 선함과 관련된 마음작용(ex; 숙고, 탐진치를 살피고 반성하고 놓아버림, 집착을 놓아버림, 망상을 놓아버림 등)을 의미합니다.
한문(중국어) 경전에서는 위짜라(vicāra)를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伺(엿볼 사; 1. 엿보다 2. 정찰하다 3. 살피다 4. 돌보다), 사찰(伺察; 엿보아 살핌), 고찰(考察; 잘 생각해서 살핌); 조사(调查), 관리(管理), 계획(计划); 持续的心专注(지속적으로 마음을 하나로 모음)
영어 경전에서는 위짜라(vicāra)를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investigation, examination(self-examinati
.
붓다께서는 호흡관(아나빠나사띠)을 이용하여 초선에 들고 위딱까-위짜라 조차도 고요해지는 이선정, 삼선정, 사선정에 이르는 너무나 심플하고도 획기적인 수행법을 제시하셨습니다. 이렇게 사선정에 들었다 나오면 마음은 고요하고 유능하고 활력이 넘치게 되어 사념처 수행을 더욱 잘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나빠나사띠 숫따(Ānāpānasati Sutta, 호흡사띠경, MN118, Mindfulness of Breathing 에 실려있는 호흡수행을 잘 살펴봅시다. 아나빠나사띠 열여섯 지침 부분만 발췌합니다:
비구는 숲이나 나무 아래, 혹은 빈 초막으로 가서 앉는다. 가부좌를 하고 몸을 곧바로 세우고 자신 앞에 사띠(새김, 마음챙김)를 확립한다.
(신념처身念處)
1. 숨을 길게 들이쉬면서, ‘나는 길게 들이쉰다.’하고, 그는 분명히 안다.(pajānāti) 혹은 길게 내쉬면서, ‘나는 길게 내쉰다.’하고, 그는 분명히 안다.
2. 짧게 들이쉬면서, ‘나는 짧게 들이쉰다.’하고, 그는 분명히 안다. 혹은 짧게 내쉬면서, ‘나는 짧게 내쉰다.’하고, 그는 분명히 안다.
3.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몸 전체를 경험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몸 전체를 경험하면서, 숨을 내쉬리라.’
4.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몸의 행(kāya saṅkhāra, 身行)을 고요히 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몸의 행을 고요히 하면서, 숨을 내쉬리라.’
(수념처受念處)
5.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기쁨(pīti)을 경험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기쁨을 경험하면서, 숨을 내쉬리라.’
6.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즐거움(sukha)을 경험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즐거움을 경험하면서, 숨을 내쉬리라.’
7.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느낌/감각 받음의) 마음 작용(cittasaṅkhāra, 心行)을 경험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마음 작용을 경험하면서, 숨을 내쉬리라.’
8.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마음 작용을 고요히(passambhayaṃ) 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마음 작용을 고요히 하면서, 숨을 내쉬리라.’
(심념처心念處)
9.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마음(Citta)을 경험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마음을 경험하면서, 숨을 내쉬리라.’
10.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마음을 기쁘게(abhippamodayaṃ) 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숨을 내쉬리라.’
11.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마음을 고요히 집중(samādahaṃ)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마음을 고요히 집중하면서, 숨을 내쉬리라.’
12.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마음을 해탈(vimoca)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마음을 해탈하면서, 숨을 내쉬리라.’
(법념처法念處)
13.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무상(aniccā)을 관찰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무상을 관찰 하면서, 숨을 내쉬리라.’
14.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탐(rāga, 貪)에서 떠남(멀어짐; vi-rāga, 離貪)을 관찰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탐에서 멀어짐(vi-rāga, 離貪)을 관찰하면서, 숨을 내쉬리라.’
15.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멸(nirodha, 滅, 滅盡)을 관찰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멸을 관찰하면서, 숨을 내쉬리라.’
16.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놓아버림(vossagga, 捨, 最捨)을 관찰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 그는 이와 같이 수련한다. ‘나는 놓아버림을 관찰 하면서, 숨을 내쉬리라.’
우선, 이 열 여섯 지침을 이해하는 어떠한 프레임, 즉 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열여섯 지침이 단계적 순서인지? 아니면 그저 순서와 상관없는 다양한 지침의 열거일 뿐인지?
우리가 이러한 고민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미 아나빠나사띠 숫따의 후반부에서 붓다께서 그 답을 제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붓다께서는 ‘호흡관은 사념처를 완성한다’고 하십니다. 즉, 사념처의 완성판, 혹은 업그레이드 버전이라는 뜻이지요.
사념처('신身/수受/심心/법法' 념처)는 이미 앞서 설명한 대로, 오온('색수상행식' 온)을 실 수행에 맞게 신身(색온)/수受/심心('수상행식' 온)으로 그리고 수행의 전체적인 프로토콜을 법法으로 배속시켜 체계화한 수행법이고, 그 목적은 오온과 그 내부기제인 육문(육근), 십이처(육근+육경), 십팔계(육근+육경+육식)가 어떻게 연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지를 관찰함으로써 오온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염오를 일으켜서 오온에서부터 일시적으로 자유로운 경지인 선정 삼매를 거쳐 최종적으로 열반으로 마음이 향하도록 함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호흡관은 사념처를 완성한다’라고 하신 대로, 위의 열여섯 프로토콜에서 ‘숨을 들이쉰다’ ‘숨을 내쉰다’라는 말만 빼버리면 더도 덜도 말고 사념처를 닦는 지침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강조하지만, 위의 팩트를 근거로 했을 때 이 열여섯 지침은 말 그대로 프로토콜이지, 이 열여섯 지침에 고정된 순서가 있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사념처를 어떤 단계에 따라 순차적으로 닦을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온이 순차적으로 조건지어 발생하는 것이지, 사념처 수행 자체를 신수심법의 순서로 닦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서 할 만한 질문이 있지요.
“아니 어차피 호흡관이 사념처를 닦는 거라면서? 그럼 여기서 호흡은 왜 끼어드나?”
이에 대한 답은 앞서의 ‘불선한 마음작용(위딱까)을 정화하는 선한 마음작용(위짜라)을 쉼 없이 일으키면서 하는 수행’의 유일한 단점이 몸의 고단함이고, 몸의 고단함은 마음의 산란을 가져온다고 한 부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위딱까-위짜라를 적용하며 주구장창 사념처만 통찰하다보면 지쳐 쓰러질 수 있지요. 걸레질만 사흘 연속으로 안 쉬고 미친 듯이 하면 어깨탈골로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걸레질 사흘만에 없어질 때라면야 그것도 방법이겠습니다만..
그러므로, 붓다의 사념처 수행의 완성판인 호흡관은, ‘간헐적 걸레질’이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즉, 위따까-위짜라를 쉴 새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호흡이 길다 짧다로 쌈빠자나를 기본으로 하다가 틈틈이 불선한 위따까(예컨대 탐진치의 생각, 산만한 생각, 망상..)가 올라오면 선한 위짜라로 정화시키는 방식으로 하라는 것이지요.
혹은 호흡이 길다 짧다 쌈빠자나하다가 틈나는 대로 선한 생각을 스스로 일으켜서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호흡관의 열째 항목인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호흡한다’는 적극적으로 선한 생각을 일으키는 것에 해당합니다. 이를 테면 오장애의 벗어남과 연관된 자신의 청정한 계행을 떠올리고(선한 생각) 이를 조건으로 깨끗한 계행과 그 과보에 대한 행복한 생각이 일어나면서 마음이 기뻐지는 것이지요.
호흡 쌈빠자나에 대해 한 가지만 더 얘기해 봅니다. ‘도대체 호흡의 길이를 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고 물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호흡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아무리 한다고 사념처가 닦이는 것도 아니지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부좌로 수행하는 환경에서는 달리 호흡 외에 지속적으로 쌈빠자나(sampajāna; 대상에 대한 바른 알아차림)를 할 대상을 찾기 힘듭니다. 만일 천천히 걷는 경행이라면 호흡 쌈빠자나 외에도 왼발과 오른발을 알아차리는 쌈빠자나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호흡을 쌈빠자나 하는데는 한 가지 의미가 더 있습니다. 붓다께서 우다나에서 메기야에게 산란한 생각(위따까)의 제거를 위해 호흡관을 닦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초선정까지는 위따까-위짜라가 수반되지요. 하지만 이선정부터는 위따까-위짜라 마저도 사라집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불선한 위따까든 선한 위짜라든 생각은 제거의 대상입니다. 그렇다면 아나빠나사띠 호흡관에서처럼 지금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호흡이 길다 짧다 쌈빠자나 해 봅시다. 길다 길다 길다 짧다 길다… 이렇게 쌈빠자나하는 동안은 다른 어떤 생각도 인지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한 번에 한 가지만을 인식할 수 있기에, 호흡 쌈빠자나를 하는 중에 어떤 생각이 인지된 경우는 호흡 쌈빠자나는 이미 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일어난 생각이 선한지 불선한지 판별하고 선하면 증장시키고 기뻐하며, 불선하면, 탐욕은 부정관으로, 성냄은 자애관으로, 아상은 무상관으로 현명하게 숙고하여 제거(걸레질)한 뒤(팔정도의 네 가지 바른 노력을 닦은 뒤), 다시 호흡의 쌈빠자나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는 역시 호흡이 길다..짧다...만 있지 다른 생각이 일어나지는 않지요. 만일 생각이 또 일어났다면 이미 호흡의 쌈빠자나는 또다시 깨어진 것이며, 이때는 다시 위의 작업을 반복하여 걸레질을 또 하면 됩니다. (간헐적 걸레질을 통한 장기전 승부이지, 사흘 반짝 걸레질로 끝나는 단기적 승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
이제부터는 호흡관 열여섯 프로토콜을 분석하겠습니다.
호흡관 열여섯 지침을 잘 분석해 보면, 1번과 2번 항목은 기본적인 호흡 쌈빠자나에 해당합니다. ‘간헐적 사념처’를 닦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항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러한 기준점이 없이 위따까/위짜라의 사념처만 닦으면 과도한 생각으로 인해 몸이 고단해지고 결국 고단해진 몸으로 인해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호흡 쌈빠자나는 필수적입니다. 축구로 치자면 축구선수가 전후반 90분을 조금도 안쉬고 뛰어다니면 피로로 사망하게 되는데, 실제 경기에서는 공이 자신에게 올 때쯤부터 뛰기 시작해서 공을 패스하고 난 뒤에는 천천히 걷기를 반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9분짜리 축구경기라면 모를까, 90분을 안쉬고 뛰는 것은 곤란하지요…
이제 호흡관의 3번부터 16번까지를 잘 보면 항상 마지막에
‘이러이러하며 숨을 들이쉬리라’ ‘이러이러하며 숨을 내쉬리라’
하는 부분이 반복되는 이유를 알 것입니다. 숨을 길다/짧다 쌈빠자나하면서 들이쉬고, 숨을 길다/짧다 쌈빠자나하면서 내쉬라는 얘기입니다.
아나빠나사띠 호흡관을 계속 분석합니다. 3번과 4번 항목까지는 사념처의 신身념처에 해당하는 닦음인데, 3번은 온 몸(색온; 물질작용 무더기)을 경험하는 것이고 4번은 몸의 행(kāyasaṅkhāra, 身行)을 고요히 하라는 프로토콜입니다. 위따까-위짜라를 끊임없이 정진하여 팔정도의 ‘네 가지 바른 노력’을 닦게 되면 오장애가 제거될 것이고 그 귀결로서 초선부터 사선까지 단계적으로 희열과 행복감 등의 느낌이 온몸에서 경험되는데, 이 단계를 거치면서 몸의 행은 고요해져 사선이 되면 호흡이 멈춘다고 니까야에서 말씀하시는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몸이 고요해지면 오온의 작용, 즉 마라의 세계(氣의 세계)는 멈추는 것이며, 이때부터는 사선정의 신통지혜의 경지에 해당합니다. 만일 누진통까지 이루면 이때 아라한이 되는 것이지요.
아나빠나사띠 호흡관 열여섯 프로토콜에서 5번부터 8번까지는 사념처의 수受념처에 해당하는 닦음입니다. 5번은 선정의 희열을, 6번은 선정의 행복한 느낌을 경험하는 것이고, 7번은 이러한 느낌작용이 오온의 연기작용에 맞물려 돌아가는 것을 인지하는 것, 8번은 이러한 느낌작용을 고요히 하는 것(사선정의 평정심의 상태)이지요. 즉, 초선부터 사선까지의 각 단계를 거치면서 느낌이 고양되면서 이 느낌이 오온과 맞물려 작동하는 것 까지를 직접 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니까야에서 삼선정의 정형구를 보면 ‘희열이 제거되고 행복한 느낌과 함께 사띠가 성성해 지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나빠나사띠 호흡관에서 사념처의 심心념처에 해당하는 9번부터 12번을 볼까요. 9번에서 마음을 경험한다고 하지요. 앞서의 논의에서 충분히 다루었듯, 마음(‘수상행식’ 온)의 식온은 자체적으로 인식될 수 없고, 오로지 접촉을 조건으로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
의식意識’이 일어날 때만 경험된다<여섯의 여섯 모음 경>’고 말한 대목이 기억날 것입니다. 즉, 호흡관을 통한 간헐적 사념처를 닦되, 육문(육근; 여섯 감각기관) 십이처(육근+육경) 십팔계(육근+육경+육식)가 작동하는 것을 생생하게 관찰하라는 얘깁니다. 그게 바로 마음의 식온 작용이 ‘안/이/비/설/신/의’식의 형태로 조건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니까요.
10번에서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호흡을 쌈빠자나하라고 하지요. 호흡이 길다 짧다 쌈빠자나하다보면 어떨 때는 저절로 선한 생각이 일어나서 마음이 기뻐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호흡이 길다 짧다 짧다 길다… 하다가 갑자기 호흡쌈빠자나를 놓치고 예전의 불선함(이를 테면 이전에 사귀던 연인과의 집착적인 속박 관계)에서 벗어나 지금은 홀로 유유자적하고 자유롭다는 생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에 연달아 ‘이렇게 홀로 유유자적하고 감각적 욕망에서 멀어진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며, 이러한 선한 상태는 진정한(진실로 바른) 행복에 가깝고, 오취온(오온에 취착하는 것)에서 멀어지며 열반에 가까워지는 것이다’하고 숙고(위짜라)가 일어나면서 마음이 흡족해지고 기쁨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혹은, 그러한 생각을 ‘일부러’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아… ‘마음을 적극적으로 기쁘게 하면서 수행한다’니요….
일체의 생각을 금하고, 게다가 선정의 즐거움을 위험하다고 얘기하는 미얀마식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피를 토할 얘기이군요. 이전 글들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미얀마식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선정의 즐거움에 빠질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무상-고-무아’ 만을 주구장창 만트라 식으로 외워대는 자신들의 위빠사나 수행(?)만으로 이미 수행은 충분하고, ‘선정은 굳이 닦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요.
이 무슨 경천동지할 얘기를 아무 거리낌 없이 하고 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게다가, 그들이 닦는 위빠사나(?)는 엄밀히 말하면 ‘이 또한 지나가리’하는 정도의 무상관일 뿐이지요. 고따마 존자가 겨우 그런식의 무상관 하나 터득하려고 힘들게 고생해서 붓다가 되었을까요? ‘무상-고-무아’ ‘무상-고-무아’… ‘이 또한 지나가리’ ‘이 또한 지나가리’… 이것 하나만을 닦을 바에라면 굳이 힘들게 출가해서 그렇게 거창하게 하지 않아도 될 터인데…
자 이제 팩트폭격입니다. 붓다가 선정의 즐거움에 관해 어떻게 가르치시는지 살펴봅시다.
<맛지마 니까야 59, Bahuvedaniya Sutta(http://
“Now, if someone were to say: ‘This is the highest pleasure and joy that can be experienced,’ I would not concede that. And why not? Because there is another kind of pleasure which surpasses that pleasure and is more sublime.”[번역: 오감의 감각적 즐거움이 최고라고 한다면 동의하지 못하겠다.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훨씬 더 수승하고 고상한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고 하시며 선정의 즐거움들을 열거하십니다.
<맛지마 니까야 66(http://
‘오감의 이러한 즐거움은 추구해서는 안 되고 개발해서도 안 되며, 닦지 말아야 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And of this pleasure I say that it is not to be cultivated, not to be developed, not to be pursued, that it is to be feared.’
고 하시고, 대신 선정의 즐거움은
‘추구해야 하고 개발해야 하며, 닦아야 하고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And of this pleasure I say that it is to be cultivated, to be developed, to be pursued, that it is not to be feared.’
고 하십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감각적 욕망에 기반한 저열한 ‘기분 좋음’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포기하는 대신, 보다 고급이면서 안전하고 궁극적으로 열반(완전한 행복)으로 향하는 선정의 ‘기분 좋음’을 추구하라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가르침입니까? (한의학적으로 보면, 생명체의 기氣의 분포分布, 즉 기분氣分이 안 좋고 나쁘면 결국 죽게 됩니다.)
심지어 <디가 니까야 29, Pasadika Sutta(https://suttacentral.net/
(초선~사선의 정형구 반복까지 중략) … These four modes of being addicted and devoted to pleasure, Cunda, conduce to utter unworldliness, to passionlessness, to cessation, to peace, to insight, to enlightenment, to Nibbāna. [(붓다께서 춘다에게 말씀하시는 내용) 번역: 춘다여, 이 네 가지 선정의 즐거움에 고취된 단계들은, 전적으로 세속을 떠남과 욕망의 빛바램, 그리고 욕망의 여읨, 그침과 편안함, 앎과 명지, 그리고 열반에 도움이 된다.]
{역주: 선정의 즐거움은 궁극적으로 사선정의 평정심(equanimity)으로 이끌고, 사선의 상태에서 계발된 (삼빠자나가 포함된) 시띠와 평정심은 오온과 연기를 여실지견하여 염오하게 되고 숙명명/천안명/누진명의 삼명(세 가지 밝은 지혜)을 이루어 열반에 도달하게 되기에, 선정의 즐거움을 개발해야 하는 것은 어찌보면 팔정도를 닦는 수행자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If then it happen, Cunda, that wanderers teaching other doctrines should declare: ‘The Sakyan recluses live addicted and devoted to these four modes of pleasure, to them ye should answer: ‘Yea.’ [번역: 만일 춘다여, 다른 법을 가르치는 외도들이 ‘사끼야의 은둔자들은 이러한 네 가지 즐거움에 헌신하고 도취되어 지낸다’라고 말한다면 그대는 ‘그러하다’라고 답해야 한다.]
It may happen, Cunda, that Teachers teaching other doctrines than ours may declare: ‘For those who live addicted and devoted to these four modes of pleasure, brother, how much fruit, how many advantages are to be expected?’[번역: 춘다여, 다른 법을 가르치는 외도들이 ‘이러한 네 가지 즐거움에 헌신하고 고취되어 지내는 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이익과 결과가 기대되는가?’하고 물어볼 수도 있다.]
Then ye should answer thus: ‘Four kinds of fruit, brother, four advantages are to be expected… (후략) [번역: 그때는 ‘다음의 네 가지 성취의 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라고 답해야 한다 (후략)… (이후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의 네 가지 성취의 이익을 열거함)]
맛지마 니까야에서도 붓다께서 선정의 즐거움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시는 부분이 나옵니다. <(비구보디역) MN 36, Mahasaccaka Sutta>에서, 고행포기 후 ‘어린시절 부왕의 농경제때 했던 선정’(수하정관)을 상기하시면서,
“왜 내가 감각적 즐거움과 불선한 상태들과 무관한 즐거움을 두려워하는가? 이제 두렵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심하게 말라 버린 몸으로는 그러한 즐거움을 얻기 힘들다. 음식을 좀 먹어 보면 어떨까..(중략)..
위따까-위짜라와 희열 행복이 있는 초선에 머물렀다. 하지만 내 안에 일어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내 마음을 침범하고 머무르지 않았다.. (중략)..
이선에 머물렀다.. 즐거운 느낌은 내 마음을 침범하고 머무르지 않았다.. (중략)..
삼선에 머물렀다.. 즐거운 느낌은 내 마음을 침범하고 머무르지 않았다.. (중략)..
사선에 머물렀다.. 즐거운 느낌은 내 마음을 침범하고 머무르지 않았다.. (후략)..”
[추가설명: 선정의 즐거움은 안전하고, ‘마음을 침범하고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시네요. 즉 마음을 오염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오염시킨다는 것은 마음을 산란하게 만드는 것(집중을 방해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선정의 즐거움에는 ‘산란하지 않은 집중된 마음상태’가 동반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진작 어린 시절 수하정관을 하시며 체험한 선정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못하시고 6년 고행을 극한의 한계상황까지 닦은 후에야 떠올리신 것일까요? 아마도 고행을 하시던 시점에서는 아직 구도에 있어 탐색 과정 중이고, 또 이전에 왕궁을 나설 때 이미 궁녀들과의 환락과 감각적 쾌락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출가하였기에 일체의 쾌락에 대한 거부감과 혐오를 가지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즐거움이라면 무조건 터부시 하시던 고행주의자의 입장에서 수하정관의 즐거움을 떠올리고 인정하기는 어려우셨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고행의 극단에서 무의미함을 깨닫고 이를 포기하신 후에는, 생각의 여유를 되찾으셨기에, 인용문구대로 ‘불선한 상태와 무관하고 감각적 즐거움과 무관한 즐거움이라면 진리탐구의 수단으로 추구해 볼 만 할 수도 있겠다’라고 판단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적어도 니까야에 기록된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선정이 위험하다거나, ‘굳이 선정은 닦지 않아도 된다’는 가르침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굳이 선정에 대해서 부정적인 경을 찾자면, <맛지마 니까야 113 사리뿟따 경(http://awake.kiev.ua/
He reflects, I’m a gainer of the first jhāna, these other bhikkhus are not the gainers of the first jhāna. On account of his first jhāna he praises himself and disparages others. This is a feature of the unworthy one. The worthy one reflects. The Blessed One has said, we should not cling to even the first jhāna. Whatever we imagine it turns to be otherwise. Giving the first preference to not clinging, he does not praise himself or disparage others, on account of the first jhāna. Bhikkhus this is a feature of the worthy one…[번역: 그는 고찰한다. ‘나는 초선을 얻었다. 다른 비구들은 초선을 얻지 못했다.’ 초선을 얻었기에 그는 자신을 내세우고 다른 이들을 업신여긴다. 이것이 값어치를 제대로 못하는 자의 특징이다. 값어치를 제대로 하는 자는 다음과 같이 고찰한다: ‘세존께서는 심지어 초선에도 취착하지 마라고 하셨다. 어떤 식으로든 초선에 대해 바라는 마음을 일으킨들, 오히려 그와 반대의 결과만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초선에 취착하지 않기에 그는 자신을 내세우지도 다른 이들을 업신여기지도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값어치를 제대로 하는 자의 특징이다. (이후 이선/삼선/사선/공무변처/식무변처/무소유처/
하지만 이 경의 핵심주제도, 색계 사전정 및 무색계정과 상수멸정까지 삼매를 닦아나가야 탁발하는 밥값을 하는 값어치 있는 수행자라는 얘기이지, ‘선정 자체가 위험하니 굳이 안 닦아도 된다’ 따위의 경천동지할 망언을 내뱉는 것이 아님에 주목해야 합니다.
선정의 즐거움은, 오온을 염오해서 그것으로부터 떠나기 위해(열반으로 가기 위해) 오온을 단계적으로 멈추는 수행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되는 해탈의 즐거움인데, 어떻게 오온에서 해방되는 즐거움에 다시 취착해서 다시 오온에 속박되겠습니까?
.
팔정도를 닦는데 선정이 불필요하다는 일부(특히 ‘청정도론’을 수행에 있어서 부동의 준거라고 하며 수행하는 부류)의 주장은 오온의 연기작용을 이해한다면 내뱉을 수 없는 얘기일 것입니다.
오온을 완전하게 떠남이 열반이요, 이것이 윤회의 종식인데, 이를 위해서는 일단 오온의 작용을 멈추어야 합니다. 초선부터 사선, 거기다 무색계정과 상수멸까지의 단계를 소개하는 경을 읽어보면 왜 이 작업이 그리도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온의 발생과 소멸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마음이 해탈하였다” (Theri. 96 yathabhutam apekkhanti khandhanam udayabbayam vimuttacitta utthasim katam buddhassa sasanam.) (테리가타 96)
[추가설명] : 오온의 생멸의 연기작용을 통찰하여 궁극적으로 오온을 싫어하게 되고 마음이 오온에 대한 취착을 놓고 해탈하는 경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적극적인 시뮬레이션 훈련으로 제시되는 것이 초선부터 상수멸정까지의 구차제정입니다.(자세한 것은 아래에서 설명함)
초선부터 상수멸까지의 구차제정을 거치면서 일체의 행이 점점 멈추며 마지막인 상수멸정에서는 오온 자체가 실질적으로 멈추는 열반의 경지까지 나아갑니다. 붓다가 상수멸정을 열반과 동일시했다는 설을 제시하는 불교학자들의 논거가 여기에서 발견되는데요. 아래에 이와 관련된 경들을 인용하겠습니다. 여럿 됩니다.
먼저
<https://suttacentral.net/
“Then, bhikkhu, I have also taught the successive cessation of formations. For one who has attained the first jhana, speech has ceased. For one who has attained the second jhana, thought and examination have ceased. For one who has attained the third jhana, rapture has ceased. For one who has attained the fourth jhana, in-breathing and out-breathing have ceased. For one who has attained the base of the infinity of space, the perception of form has ceased. For one who has attained the base of the infinity of consciousness, the perception pertaining to the base of the infinity of space has ceased. For one who has attained the base of nothingness, the perception pertaining to the base of the infinity of consciousness has ceased. For one who has attained the base of neither-perception-nor-non
사실, 상수멸(멸진)은 오온(색수상행식)에서 부터 자유로운 경지, 열반의 경지입니다.
상수멸정의 경지는 직접 그 단계까지 도달한 자를 제외하고는 추론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경지이기에 여기서 자세히 언급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다만, 수행과 관련하여 조금이나마 정보를 남기고자 추론으로 가능한 부분까지는 언급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공무변처정부터 시작하는 무색계정은 붓다께서 보살 때 알라라 깔라마에게 배우신 것처럼, 사선정을 얻기 이전에도 닦을 수 있는 별개의 삼매로 보아야 합니다. 니까야에서 붓다께서 무색계정을 언급하실 때는 항상 색계 사선정 이후의 단계로써 언급하시지만, 이는 이미 앞에서 얘기했듯 멸진(상수멸)이라는 모든 행의 지멸을 위한 단계적 절차(구차제정)를 설명하실 때이고요.
.
공무변처를 닦기 위해서는 눈을 감고(눈을 감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으나 감는 것이 색깔과 형상을 지닌 물질의 세계를 뛰어넘는 경지인 공무변처정을 닦는 데 도움이 되는 것만은 자명합니다) 무한한 공간을 떠올립니다. 이제 그 공간의 경계까지 인식을 넓혀 나갑니다. ‘아 이만큼의 무한한 공간이군’하고 인식하는 순간(바로 그 찰나), 그 경계지음의 행위과 동시에 그 경계 밖에 공간이 더 있을 수밖에 없는, 일종의 ‘인지의 패러독스’에 빠집니다. 이제 그만큼의 잉여공간으로 경계를 더 확장합니다. 역시 그만큼 확장된 공간을 인식하려면 그 밖의 어떠한 경계를 또다시 설정해야 하고, 그러한 경계를 설정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그 경계 너머의 더 많은 공간에 대한 인식으로 귀결되지요. 이를 계속 반복할 수 있습니다. 경계의 인식이라는 행위 자체가 그 경계 너머의 또 다른 경계에 대한 인식을 유도하고, 그 경계를 인식하는 행위 자체가 또 다른 경계의 인식을 유도하기에… 이는 수학이나 언어학에서 말하는 일종의 ‘재귀용법’ 과 비슷합니다. (일종의 무한 도미노)
무한히 확장되는 공간의 인식. 사실 이 공무변처는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또 무지 쉽습니다. 혼침도 잘 생기지 않습니다. 오토 파일럿처럼 자동적으로 무한히 도미노가 넘어지기에… 공무변처정에서는 삼십분도 지루하지 않고 순식간에 지나갈 수 있습니다. 붓다께서 공무변처의 이득은 색계 사선이 속한 ‘형상의 세계’를 떨쳐냈다고 말씀하시는 부분도 설명이 되지요. 공무변처의 무한 도미노..를 하다보면 어떤 형상이라는 세계를 인식하는 자체가 불가하게 됩니다. 형상은 공간에서만 인지할 수 있는 것이거늘, 공간에 대한 인식 자체가 그 인식 행위 자체를 즉각적으로 무의미하게 만드는 무한 도미노의 놀음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보살 때 알라라 깔라마에게 공무변처정을 배우시고, 이후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비상비비상처정을 배우시고도 만족을 못하시고 그들에서 떠나신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근원적인 윤회의 종식과는 거리가 먼 수행이기 때문이지,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서 수행하는 제자들이 ‘일체의 행行 없는 휴식’이라 할 수 있는 멸진(상수멸)의 성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거쳐야 하는 삼매이기에 이 공무변처정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공무변처정 다음으로 식무변처정을 얘기합니다. 공무변처정에서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무한도미노를 할 수 있고, 실제로 혼침도 없고 오토파일럿이기에 재미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도데체 무한히 반복되는 이것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가’하는 인식을 일으키면, 바로 이것이 식무변처정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됩니다. ‘이것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가. 답답하고 갑갑하다…’ 하는 인식을 계속 일으키다 보면 어느새 공무변처정의 일체(끝없는 일체의 공간의 차원)의 바깥을 보게 됩니다. 눈으로 보거나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공무변처정의 세계, 즉 일체의 공간의 차원을 인식하는 것을 조건으로 그러한 일체의 공간을 벗어난 경지를 ‘간접적으로’ 혹은 ‘조건적으로’ 인식하는 것이지요. 망원경의 렌즈를 통해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별을 보는 것처럼, 공무변처정으로 대변되는 ‘일체의 공간에 대한 인식의 세계’를 통해(그것에 의지해서),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인식되지 않는 ‘의식의 세계’를 인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실제로 해 보면 참으로 신비스럽게 일어나기에 말이나 글로 전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매번 식무변처로 넘어갈 때마다 ‘아 저번에 어떻게 해서 식무변처로 넘어갔더라…’하고 난감할 때가 많은데 막상 해 보면 신비스럽게도 그렇게 식무변처로 넘어가게 됩니다. 마치 운전이라는 기술을 배우게 되면 저절로 운전이 되면서 그것이 어떻게 저절로 되는지 자기 스스로에게 설명하기 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어제 운전을 할 수 있었는데 오늘은 운전을 못하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듯이, 공무변처에 대해 ‘도데체 언제까지 무한 도미노를 하고 있어야 하나..’하고 답답한 인식을 일으키고 있으면 어느새 저절로(?) 일체의 공간의 세계를 지탱(?)해 주는, 그 저변에 깔린 ‘일체의 의식의 세계’가 (공무변처를 조건으로) 인지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식무변처정이 시작되면, 이제는 ‘공간’이던 무한 도미노의 대상이 ‘의식’으로만 대체될 뿐, 무한 도미노는 똑같이 일어납니다. 어떤 인식이 일어나고, 그 인식의 경계를 인지하는 순간, 그 인식을 다시 인식하는, 마치 꿈속에서 꿈인 줄 아는 것과 비슷한, 그러한 인식이 또 인지되고, 또 다시 그러한 인식을 인지하는 경계가 인지되자마자 자동적으로, 마치 오토파일럿처럼 또 다시 그 인식을 인식하는 더 큰(? or 넓은?) 인식이 일어나고… 이 역시 무한 도미노인 것입니다.
이러한 식무변처정도 ‘어떠한 특정한 인식’을 붙들 수 없는 것이, ‘인식을 인지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그러한 인식에 대한 ‘메타(meta) 인식’을 불러일으키기에 빛보다 빠른 속도(?)로 의식의 무한 도미노는 계속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러면 공무변처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처음부터 식무변처정으로 들어가면 어떠냐?”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막상 실제로 식무변처부터 시작하면 가능은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했을 경우 식무변처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대신 충분히 공무변처정에 있다가 식무변처정으로 넘어간 경우는 식무변처정의 무한 도미노가 오래 지속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식무변처정 역시 한 시간이고 열 시간이고 무한 도미노를 하는 동안은 혼침도 일어나지 않고 다른 생각 같은 것이 일어날 찰나도 없이 계속 전광석화같이 의식의 무한 도미노로만 있기에 참 좋기도 하고 평안하기도 합니다.
단 하나의 조건을 제외하고요.
‘아 이 의식의 도미노를 언제까지 해야 하나.. 답답하다’하는 인식만 일으키지 않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두 시간을 식무변처정에 있어도 편안하고 좋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면 그렇게 해도 되겠지요.
하지만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정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러한 인식을 일으키고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아 이것을 언제까지 하고 있어야 하나.. 답답하다(이것조차도 족쇄이고 구속이다)’
이런 마음이 일어나면 앞서의 공무변처에서 넘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무한한 의식의 세계’를 조건으로 그 밑바닥(?)이랄까.. 그 기저에 깔린 세계(?)에 대한 인식이 ‘조건적으로’ 일어납니다. 직접 눈으로 보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식무변처정’을 조건으로 인지할 수 있기에 ‘조건적’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없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참으로 신기한데, 식무변처에서 벗어나 해방된 경지에서는 아무것도 없음 그 자체만이 인식이 되는 것입니다.
법구경의 첫 번째 경구에서
"모든 정신적 상태들은 마음(의식)에서 비롯된다" (Chapter 1, The Pairs. 1. Mind precedes all mental states. Mind is their chief; they are all mind-wrought.)
라고 하는 것도 식무변처와 무소유처의 경계를 이미 넘나든 보살(고따마 존자)의 깨달음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다가 갑자기 일체의 의식세계가 열리면서 모든 정신적 상태들이 작동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빅뱅’과도 비슷할 듯 합니다만…)
물론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등등은 당시 보살이셨던 고따마 존자의 작품은 아니고 이미 알라라 깔라마 등 당대 요가 사문(요기)들의 수행 주제였기에 그 수행의 역사는 더 오래 되었을 것입니다. 또 고대 인도인들의 세계에 대한 인식 수준(세계관)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한데, 일체의 공간인 공무변처 역시 식무변처의 기반 위에(?) 떠오르고, 일체 의식의 영역인 식무변처 역시 무소유처의 기반 위에(?) 의지해 있음을 이미 깨달은 고대 인도의 과학문명의 수준에서는 ‘우주는 무한하냐 무한하지 않으냐’ 따위의 산술적 질문 따위보다는 의식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에 더 관심이 많았을 것입니다. 인도에서 숫자 0을 발견한 것과도 일맥상통하고요…
이정도로 각설하고, 다시 무소유처의 얘기를 계속 이어나갑니다. 이전까지 무한 도미노였던 ‘무한한 의식의 세계’에서 해방되어 이제는 그저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고요함, 그 자체만이 인지되는 평온하고 안락한 세계입니다. 일체의 도미노랄까 작용 등이 인식되지 않고 그저 ‘아무것도 없다’는 인식만이 식무변처를 조건하여(?) 인지될 뿐인 경지이죠. 무소유처는 참 편안합니다. 편안하고 좋고 아늑합니다. 한 시간이고 열 시간이고 이렇게 편안하게 ‘가만히’ 있을 수 있지요.
다시 강조하지만, 이렇게 무소유처에 열 시간 있는 것은 시간 낭비일 것입니다. 그 시간에 사념처를 닦아 마음의 청정을 이뤄야죠. 무색계정은 엄연히 붓다 성도 이전 외도들의 수행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무소유처에서 열 시간이고 원하는 만큼 편안히 있을 수 있지만, 이 편안함은 단 하나를 조건으로 깨어집니다. 이미 예상하셨겠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경지를 도대체 얼마 동안 인식하고 있어야 하나.. 답답하다..’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일으키게 되면 그 좋고 안락하던 무소유처정도 답답한 감옥같이 느껴지고 탈출하고 싶어집니다.
계속 그러한 인식을 꾸준히 일으키다보면 ‘아무것도 없는 경지(무소유처)’를 조건해서, 그 배후(?)에 깔린 ‘인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식이 있지 않는 것도 아닌 경지’ 즉 비상비비상처가 인지됩니다. 아까의 설명처럼, 망원경 렌즈에 의지해서 육안으로 안 보이는 별을 보는 것처럼, 무소유처정에 대한 인식에 의지해서 ‘무소유처정에 대한 인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식이 있지 않는 것도 아닌’ 애매한 경지가 인지되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이 세상에 죽음이라는 것이 없다면 삶이란 것이 인지될 리가 만무하고, 영원히 배가 고프지 않다면 배가 부름이라는 현상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무소유처정이 아니라면 비상비비상처정이 인지되지 않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무소유처정에 의지해서 ‘조건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인지되는 것이니까요.
이전의 식무변처정은 공무변처정의 토대였고, 무소유처정은 식무변처정의 토대였던 반면, 이 비상비비상처정은 무소유처정의 토대(?)라기 보다는 조금 달리 인식됩니다. 비상비비상처정의 인식 자체가 ‘흐릿해지거나’ 혹은 ‘불명확한’ 것입니다. 과연 ‘비상비비상처정에 대한 인식’인가? 하고 반문하게 되는, 혹은 의심하거나 불확실한 인식인 것이지요.
사실 붓다가 되기 전 보살 때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비상비비상처정까지 배우시면서 이미 고따마 존자는 연기에 대한 체험적인 이해를 키웠을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공무변처정을 조건해서 식무변처의 세계가 인지되고, 식무변처정을 조건으로 무소유처가 ‘조건적으로’ 인지되고, 무소유처정을 조건으로 비상비비상처가 ‘조건적으로’ 인지되기에, 이러한 ‘조건지어져 있음’은 붓다께서 연기법을 발견하시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해 주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
라는 붓다의 연기법이 과연 보살 때 무색계정을 닦지 않으시고도 처음부터 6년 고행만 하셔서 발견되었을지 의문이 들 정도인 것이지요.
마침, <쌍윳따 니까야 14.11(http://
“… 형상을 조건으로 공무변처가, 공무변처를 조건으로 식무변처가, 식무변처를 조건으로 무소유처가, 무소유처를 조건으로 비상비비상처가 인지된다…”
개인적으로 비상비비상처정을 해 보았을 때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또 앞서의 공무변처-식무변처-무소유처와는 달리 ‘편안하다’든가 ‘안락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저 불분명하고 또렷하지 않고 이도 저도 아니어서 뭔가 편안하지 않은, 그런 인식인듯도 아닌듯도 한.. 또 인식이 아니라고 하기도 뭐한 그런 인식이랄까요. 여하튼 개운치가 않았습니다.
상수멸정, 혹은 멸진정이라 부르는 경지는 일체의 인식 자체가 완전히 소멸한 경지이지만, 그렇다고 목숨이 죽은 것은 아니고 여전히 유지되는 상태를 말하지요. 이 단계는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선정(색계 삼매)을 기반으로한 사념처 수행조차 충분히 닦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상수멸정(멸진정)과 관련해 <맛지마 니까야 31, 쭐라고싱가 숫타culagosinga sutta(https://suttacentral.net/
“Why not, venerable sir? Here, venerable sir, whenever we want, by completely surmounting the base of neither-perception-nor-non
“Good, good Anuruddha. There is no other comfortable abiding higher or more sublime than that one.” [번역: “장하고 장하구나 아누룻다여. 실로 그보다 이상 가는 더 높고 고귀한 편안함의 경지는 존재하지 않느니라.”]
.
자, 이제부터는 무색계정(무색계 삼매) 및 멸진(상수멸)과 관련하여 참고할 경들을 소개합니다. 필요하시면 직접 원문을 검토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쌍윳따 니까야 36.31 (https://suttacentral.net/
<앙굿따라 니까야 9.36(https://suttacentral.net/
<앙굿따라 니까야 9.41(https://suttacentral.net/
“이선에서 삼선으로 넘어가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삼선에서 사선으로는 어떻게 넘어갑니까?”
라고 선정에 대한 질문을 한다면, 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이 경에서 붓다께서 언급하시는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중부 제6, 아캉케야(Akankheyya)경>에서,
“계를 완전하게 갖추고, 자기 마음의 사마타(止)를 실천하고, 자나(禪; 선정)를 경시하지 않고, 위빠사나(觀)을 갖추어 한적한 곳에서 빤냐(지혜)를 증장시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의: 여기서 말하는 ‘위빠사나’는 미얀마에서 개발한 수행법인 ‘미얀마식 위빠사나 수행’ 이 아님을 유념해야 합니다.)
라고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자나(禪)’, 즉 ‘선정’의 각 단계를 거치면서 지관止觀, 즉 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를 함께 닦아나가는 것이 붓다의 수행임을 역시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선정수행의 각 단계는 ‘지止’와 ‘관觀’ 을 같이 닦아 나가는 토대인 것입니다.
지관겸수止觀兼修와 관련해서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앙굿따라 니까야 4.170 (https://suttacentral.net/
samathapubbaṅgamaṃ vipassanaṃ bhāveti.
지止(사마타)를 먼저 해서 관觀(위빠사나)을 수행한다
vipassanāpubbaṅgamaṃ samathaṃ bhāveti.
관觀을 먼저 해서 지止를 수행한다
samathavipassanaṃ yuganaddhaṃ bhāveti.
지止와 관觀을 함께 수행한다
.
아래 경에서 보듯이 사념처 수행은 필수적으로 지관겸수止觀兼修일 수밖에 없습니다.
<맛지마 니까야 111, ‘일어난 차례대로’경 Anupada Sutta(https://suttacentral.net/
"비구들이여, 여기에,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불선한 상태들로부터 떨어져서, 사리뿟다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되는 생각을 동반하고, 멀리 떨어짐에서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함께한 첫 번째 선정에 들어가 머물렀다.
그리고 첫 번째 선정의 상태들인, 위딱까(지복에 집착하는 마음 작용), 위짜라(집착을 반성하고 놓아버리는 마음 작용), 기쁨, 즐거움, 그리고 마음의 통일, 또한 접촉 느낌 지각 의지의 마음, 그리고 열정, 결정심, 정진, 알아차림, 평정과 주의, 이러한 상태들을, 그는 그것들이 일어나는 대로 하나하나 분명하게 밝히고, 그 상태들이 일어난 것을 알고, 그 상태들이 존재하는 것을 알고, 그 상태들이 사라진 것도 알았다. 그는 이와 같이 이해했다. ‘그래서 실로 이러한 존재들은 없었던 것이 나타나게 되고, 존재하다가, 그것들은 사라진다.’ ... 그는 ‘더 벗어나 도피할 곳이 있다’는 것을 이해했고, 그리고 그 성취를 계발함으로써, 그곳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시, 비구들이여, 위딱까-위짜라가 고요해짐으로써, 사리뿟다는 자신감과, 위딱까-위짜라가 없는 마음의 단일성이 있고, 집중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 함께한, 두 번째 선정에 들어가 머물렀다.
그리고 두 번째 선정의 상태들인, 자신감, 기쁨, 즐거움과 마음의 통일, 또한 접촉, 느낌, 지각, 의지의 마음, 또한 열정, 결정심, 정진, 알아차림, 평정과 주의, 이런 상태들을 그는 하나하나 일어나는 대로 분명하게 밝히고, 그 상태들이 일어난 것을 알았고, 그 상태들이 존재하는 것을 알았고, 그 상태들이 사라진 것도 알았다. 그는 이와 같이 이해했다 … 그리고 그 성취를 계발함으로써, 그는 더 높은 상태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시, 비구들이여, 기쁨도 또한 사라짐과 함께, 사리뿟다는 알아차림과 완전한 앎으로 평정에 머물고, 여전히 몸으로 즐거움을 느끼면서, 그는 성인들이 ‘평정과 알아차림을 가진 자는 즐겁게 머문다.’ 하고 선언하신 바대로 세 번째 선정에 들어가 머물렀다.
그리고 세 번째 선정의 상태들인, 평정, 즐거움, 알아차림, 완전한 앎과, 마음의 통일, 또한 접촉, 느낌, 지각, 의지의 마음, 또한 열정, 결정심, 정진, 알아차림, 평정과 주의, 이런 상태들을 그는 하나하나 일어나는 대로 분명하게 밝히고, 그 상태들이 일어난 것을 알았고, 그 상태들이 존재하는 것을 알았고, 그 상태들이 사라진 것도 알았다. 그는 이와 같이 이해했다 … 그리고 그 성취를 계발함으로써, 그는 더 높은 상태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시, 비구들이여, 즐거움과 고뇌를 버리고, 그 이전에 기쁨과 슬픔도 사라짐으로, 사리뿟다는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평정으로 인한 알아차림의 청정함이 있는, 네 번째 선정에 들어가 머물렀다.
그리고 네 번째 선정의 상태들인, 평정,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고요함으로 인한 정신적인 무관심, 알아차림의 청정함과, 마음의 통일, 또한 접촉, 느낌, 지각, 의지의 마음, 또한 열정, 결정심, 정진, 알아차림, 평정과 주의, 이런 상태들을 그는 하나하나 일어나는 대로 분명하게 밝히고, 그 상태들이 일어난 것을 알았고, 그 상태들이 존재하는 것을 알았고, 그 상태들이 사라진 것도 알았다. 그는 이와 같이 이해했다 … 그리고 그 성취를 계발함으로써, 그는 더 높은 상태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시, 비구들이여, 형상에 대한 지각을 완전히 극복하고, 감각적 자극에 대한 지각이 사라지고, 다양한 것들에 대한 지각에 주의를 주지 않음으로써, ‘공간은 무한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사리뿟다는 무한한 공간의 토대(空無邊處)에 들어가 머물렀다.
그리고 공무변처에 있는 상태들인, 무한한 공간의 토대에 대한 지각과 마음의 통일, 접촉, 느낌, 지각, 의지의 마음, 또한 열정, 결정심, 정진, 알아차림, 평정과 주의, 이런 상태들을 그는 하나하나 일어나는 대로 분명하게 밝히고, 그 상태들이 일어난 것을 알았고, 그 상태들이 존재하는 것을 알았고, 그 상태들이 사라진 것도 알았다. 그는 이와 같이 이해했다 … 그리고 그 성취를 계발함으로써, 그는 더 높은 상태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시, 비구들이여, 공무변처를 완전히 극복함으로써, ‘의식은 무한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사리뿟다는 무한한 의식의 토대(識無邊處)에 들어가 머물렀다.
그리고 식무변처에 있는 상태들인, 무한한 의식의 토대에 대한 지각과 마음의 통일, 또한 접촉, 느낌, 지각, 의지의 마음, 또한 열정, 결정심, 정진, 알아차림, 평정과 주의, 이런 상태들을 그는 하나하나 일어나는 대로 분명하게 밝히고, 그 상태들이 일어난 것을 알았고, 그 상태들이 존재하는 것을 알았고, 그 상태들이 사라진 것도 알았다. 그는 이와 같이 이해했다 … 그리고 그 성취를 계발함으로써, 그는 더 높은 상태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시, 비구들이여, 식무변처를 완전히 극복함으로서, ‘아무것도 없다’ 는 것을 인식하고, 사리뿟다는 무의 토대(無所有處)에 들어가 머물렀다.
그리고 무소유처에 있는 상태들인, 무소유처의 지각과 마음의 통일, 또한 접촉, 느낌, 지각, 의지의 마음 또한 열정, 결정심, 정진, 알아차림, 평정과 주의, 이런 상태들을 그는 하나하나 일어나는 대로 분명하게 밝히고, 그 상태들이 일어난 것을 알았고, 그 상태들이 존재하는 것을 알았고, 그 상태들이 사라진 것도 알았다. 그는 이와 같이 이해했다 … 그리고 그 〔성취〕를 계발함으로써, 그는 더 높은 상태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시, 비구들이여, 무소유처를 완전히 극복함으로써, 사리뿟다는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의 토대(非想非非想處)에 들어가 머물렀다.
그는 그 성취로부터 알아차림을 가지고 깨어났다. 그렇게 하고서, 그는 통과하고, 소멸하고, 변한 상태들을 이와 같이 숙고했다. ‘실로, 이 상태들은 전에 없다가, 나타났다가,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 그는 ‘더 벗어나 도피할 곳이 있다’는 것을 이해했고, 그 성취를 계발함으로써, 그곳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극복함으로써, 사리뿟다는 지각과 느낌의 소멸(想受滅)에 들어가 머물렀다.
그는 그 성취로부터 알아차림을 가지고 깨어났다. 그렇게 하고서, 그는 통과하고, 소멸하고, 변한 상태들을 이와 같이 회상했다. ‘실로, 이러한 상태들은 없었던 것이 나타나게 되고, 존재하다가, 그것들은 사라진다.’ 이러한 상태들과 관련해서 그는 더 이상 끌리지도 않고, 물리치지도 않고, 독립적으로, 떨어져서, 자유롭게 분리되어서, 모든 장애물을 여윈 마음으로 머물렀다. 그리고 그의 모든 번뇌(탐진치)는 그의 지혜로 봄으로써 완전히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