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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無心님의 불교이야기

윤회만 없다면, 당장 붓다의 수행을 그만두리라

<윤회만 없다면 당장 붓다의 수행을 그만두리라>
- 붓다의 수행을 따라서 수행하는 nswsam님의 글 (일부 수정보완)

필자는 붓다와 의리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다. 그렇다고 붓다의 수행과 열반에 도달한 그 길에 대해 확신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확신은 거의 100%에 근접한다. 요점은, 필자의 경우 철저히 붓다의 수행을 스스로 실험과 검증을 통해 확인해 오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절대로 바꾸려 하지 않는 신념이 있다.

“만일 윤회가 없다면 당장 이 모든 수행을 그만두고 감각적 욕망을 100% 충실히 즐기면서 살겠다.”

하지만,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항상 이 신념은 틀렸음이 깨어짐을 필자는 실험을 통해 확인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앞으로도 혹시 수행에 의구심이 든다면 위와 같이 다시 한 번 실험하고자하는 마음을 낼 것이다. 붓다의 법이 강력한 점은, 실험과 검증을 통과한다는 점이다. 붓다도 늘 “와서 (이 법이 유익하고 열반으로 이끄는지) 보라”(come and see) 라고 권유하였다는 점을 상기하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윤회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하는가? 

필자의 경우 윤회가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당장 하루하루 팔정도 수행 자체를 해 나갈 수 없게 된다. 대충 붓다가 맞겠지.. 하고 믿고 수행할 수 있는가? 만일 붓다의 말이 거짓이고, 죽으면 끝이며 윤회가 없으면 어떡할 것인가? 애매한 믿음으로 해 나갈 수 있는 수행이 아니기에, 필자에게는 100% 윤회가 맞는다는 증거가 필요하다. 그래야 이 수행을 계속해나갈 수 있다. 다시 상기하자. 빠알리 니까야에 나와 있는 아라한의 열반송 정형구는 “성스러운 삶은 완성되었으며 해야 할 일을 다 마쳤다. 이 생이 마지막 생이며 더 이상 태어남은 다했다.” 라는 것을.

(수행을 현실 생활에서 마주치는 단편적 괴로움을 제거하기 위해 취미로 수행하는 정도로 할 바에는 굳이 힘들게 윤회의 종식이 목표인 팔정도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 그저 교회를 다니거나 사주를 보거나 심리상담 등을 받아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한 때 필자가 지인과 “어떻게 무아인데 윤회할 수 있는가”라는 대담을 한 적이 있다. 아래는 그 대담의 핵심 골자만 간략히 글로 인용하기로 한다.

크게 세 가지로 윤회가 실제임을 입증할 것이다. 앞의 두 가지는 간접적 추론이고 세 번째는 직접적 실험을 통한 입증이다.

우선, 세상에서 발견되는 연기적 조건성의 간단한 적용을 통해서다. “닭이 있으면 달걀이 있다. 달걀이 있으면 닭이 있다”라는 문구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를 잘 설명한다. 어느 하나도 먼저나 나중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가 옳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에 태어나는 현상을 논해보자. 왜 우리는 태어나면 그걸로 쭉 가면 되지, 죽음을 경험하는가? 그냥 태어남만으로 계속 지속할 수는 없는가? 위의 논지대로, 태어남과 죽음은 서로 의존 관계다. “태어남이 있으므로 죽음이 있다. 태어남이 없다면 죽음은 없다.” 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생성이 있으므로 소멸이 있다. 생성이 없다면 소멸도 없다.”

가 되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논의해 보기로 하자. 만일 생성을 하되, 소멸은 하지 않는 것이 (사람이건 사물이건 무엇이건 간에) 있다고 해 보자. 그렇다면 그것은 소위 ‘영원한 것’ 이어야 한다. 왜? 소멸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으므로. 그렇다면 그러한 ‘영원한 것’은 항구적으로 원래부터 있어야지, 생성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사람이건 사물이건 무엇이건 간에) 이미 '생성을 하되, 소멸은 하지 않는 것’ 이라고 했으므로 그 자체로 모순이 된다.

따라서,

“생성된 것은 반드시 소멸한다.”가 증명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남이 있으므로 반드시 죽음이 있다.”도 동시에 입증이 된다. 

심지어 천국에서 태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종교도 이를 피하지 못한다. 이번 생에 지상에서 죽고 천국에서 태어난다고 해도, (설사 천국에서의 수명이 수십억 년이라 하더라도) 태어났다는 사실 때문에 반드시 천국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붓다가 출가수행을 못하는 재가자들에게 선업을 쌓아 다음 생에 천신으로 태어나라고 한 이유는 천신도 수행을 할 수 있기에 다음 천신의 삶에서 행복하게 태어나 거기서 수행을 해라는 것이지, 선업을 쌓아 천국에서 태어나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라고 얘기하지는 않았다. 만일 선업을 쌓아 천국에서 태어나면 만사 오케이라면 붓다 자신도 미쳤다고 힘들게 출가수행을 해서 아라한이 되었겠는가?

앞에서

“태어남이 있으므로 반드시 죽음이 있다.”는 충분히 입증이 되었다. 

그러면 그 반대는 어떻게 입증할까? “죽음이 있으므로 태어남이 있다” (소멸이 있으므로 생성이 있다) 마저도 성립해야 윤회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태어남의 반대 개념이다. 태어남이 죽음의 반대 개념이듯이. 따라서 “동이 있으니 서가 있다. 서가 있으니 동이 있다. 동이 없으면 서도 없다. 서가 없으면 동도 없다.”처럼 “태어남이 있으므로 죽음이 있듯이, 죽음이 있으므로 태어남이 있다.”가 성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죽으면 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윤회에 대한 첫 번째 간접 입증이다.

이제 두 번째 간접 입증으로 넘어가자. 네 살짜리 ‘홍길동’이라는 아이가 있다고 하자. 이 녀석이 단것을 너무 좋아하고 이는 열심히 닦지 않았다. 어느새 길동이는 열아홉이 되었다. 그런데 대학생인 열아홉 길동이는 단 것도 안 먹고 열심히 이를 닦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동이의 치아 상태가 매우 나쁘고 치통이 심하다. 길동이는 억울해 한다. ”아니 단 것도 안 먹고 이도 열심히 닦는데 왜 치통 때문에 괴로움을 겪어야 합니까?” 

자, 네 살짜리 홍길동과 열아홉 홍길동은 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 네 살 홍길동의 몸과 열아홉 홍길동의 몸은 많이 다르다. 힘도 다르고 목소리도 다르다. 하드웨어가 다른 것이다. 또, 네 살 홍길동의 정신(생각)과 열아홉 홍길동의 정신(생각)은 많이 다르다. 네 살 홍길동의 생각은 먹는 것, 노는 것, TV보기 등등이라면 열아홉 홍길동의 생각은 주로 여자친구, 사진찍기, 여행, 취업 등등 완전히 다르다. 즉 소프트웨어가 다른 것이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다르면 다른 존재이다.

따라서 네 살 홍길동과 열아홉 홍길동은 다른 홍길동이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네 살 홍길동이 변해서 열아홉 홍길동이 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논리라면 내가 어제 먹은 치킨과 피자가 변해서 오늘의 내 몸이 되었으므로 ‘나는 치킨입니다’ ‘나는 피자입니다’라고 해야 한다.) 자, 서로 다른 존재인 네 살 홍길동과 열아홉 홍길동이지만, 이들 간에는 어떤 연결 고리가 있다. 무엇일까?

바로 ‘업’, 즉 원인과 결과이다.

네 살 홍길동과 열아홉 홍길동은 다른 존재이지만, 네 살 홍길동이 저지른 원인(단 것을 좋아하고 이를 닦지 않음)의 결과(치통이 심함)는 고스란히 열아홉 홍길동이 받는 것이다. (이는 논의를 위한 임의의 시뮬레이션임을 감안하자. 붓다는 업이 과보로 맻히는데 시간이 걸림을 설하였지만,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는 일일이 파악하기 힘들다고 하였다. 그 시간 사이에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네 살 길동이가 단 것을 좋아하여 네 살 때 이미 치통이 매우 심할 수도 있다. 혹은 네 살 때는 멀쩡한데 여섯 살 부터 치통이 심해질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단것을 좋아하고 이를 잘 닦지 않는다는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게 언제이든 치통이라는 과보는 원인이 존재하는 한 피할 수가 없다.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원인을 애초에 짓지 않는 것뿐이다.)

정리하자면, 네 살 홍길동이 연기적으로 윤회(삼사라)하여 정신과 육체가 전혀 다른 열아홉 홍길동이 되었고, 이 둘은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네 살 홍길동이 저지른 업의 결과를 엉뚱하게 열아홉 홍길동이 받는 다는 것이다. 열아홉 홍길동은 억울할 것이다. 티비에서 태어날 때부터 기관지가 심하게 안 좋아서 병치레하다가 일찍 죽는 아이들을 본 적이 있는가? “저 어린 애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저렇게 태어나자마자 고생하나…” 하는 것이나 “아니 열아홉 홍길동이 무슨 단 것을 먹고 이를 안 닦았다고 이렇게 심한 치통으로 고생을 해야 하나..” 하는 것이나 같은 개념이다. 여기까지가 윤회에 대한 두 번째 간접 추론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윤회에 대한 간접 추론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실험으로 검증되는 입증만이 남았다. 필자는 앞의 두 가지 추론으로도 만족되지 않다가 이 세 번째 입증을 통해서만 백 프로 만족하고 윤회에 대한 의심이 흔들리지 않고 매일 팔정도 수행을 하고 있다.

세 번째 입증은 바로 붓다의 깨달음의 핵심인 오온의 연기적 작용에 대한 고찰이다. 이는 이미 팔정도 수행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일상에서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오온은 연기적으로 일어남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명을 위해, 오온을 먼저 살펴보자. 참고로 세상에서 붓다만의 유니크한 것이 오온설이다. 다른 종교나 철학, 사상 어디에서도 오온설을 발견할 수 없다는 얘기다. 오온(색/수/상/행/식)이 연기적으로 조건발생함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 붓다의 십이연기이기에, 연기설 또한 붓다만의 유니크한 것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오온을 확대하면 십이연기가 되는 것이고, 오온마저 축소하면 쿳다까니꺄야 우다나의 첫 번째 경인 깨달음의 경에 나온 대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가 되는 것이다.

오온설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온(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색色은 몸이다. 수受는 감각기관을 통해 감각대상과의 접촉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느낌이다. 상想은 그 느낌을 조건으로 하여 떠오르는 인지(인식, 지각)나 개념을 말한다. 행行은 그러한 인지나 개념을 놓고 일어나는 신/구/의 세 가지의 의지 작용이다. 이를 테면, 초콜릿을 먹고 좋은 느낌은 ‘수受’, 그 ‘수受’를 조건으로 ‘달다.. 좋다..’ 하고 떠오르는 인지나 개념은 ‘상想’, 그 ‘상想’을 놓고 ‘아 이 초콜릿 되게 달군’하고 문장이 떠오르면 신/구/의 세 가지 행行온 중 ‘의행意行’이고, 실제로 ‘오 되게 단데’ 하고 목소리로 되뇌이면 ‘구행口行’, 이 단맛이 좋아서 저절로 어깨춤이 일어나면 ‘신행身行’인 것이다. 

식識온은 이러한 신/구/의 세 가지 의지 작용인 행行온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아는(앎) 작용이자 그 앎(알음알이)의 쌓임으로 인한 일종의 ‘마음의 잠재 경향성’이다. 위와 같이 초콜릿의 단 맛에 대해서 행行온을 의지적으로 일으켰을 경우, 초콜릿에 대한 탐욕의 잠재 경향성은 증장하게 된다. 식識온의 잠재 경향성은 아무 때나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향성일 뿐이기에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으며, 실제 식識온의 잠재 경향성이 관찰되는 때는 안/이/비/설/신/의 육근(여섯 감각기관)을 통해 감각 대상과 또 다른 접촉이 일어날 때만이며, 이때 접촉 대상에 따라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육식六識으로 드러난다. 더 자세한 내용은 맛지마 니까야 ‘여섯의 여섯 모음‘ 경을 참조하기 바란다.

정리하면, 오온은 쉽게 말해 우리 자신이며, 우리는 오온의 형태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데, 우리를 구성하는 이 오온이 연기적으로 윤회(삼사라; 순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위의 경우처럼 초콜릿을 먹으면서 신/구/의 어떤 식으로든 행行온이 일어난 경우, (하다못해 ‘초콜릿은 달다’ 라는 생각만 해도 의지작용을 거쳤기에 ‘의행意行온’이 일어난 것이다) 초콜릿에 대한 탐욕에 기반한 식識온의 잠재 경향성은 다음 번에 비슷하게 초콜릿을 먹는 상황이 또 일어나기를 잠재적으로 탐착하게 된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중독’은 시작된다. 그것이 초콜릿이건 담배이건 무엇이건 간에…

만일 초콜릿을 먹으면서 그냥 ‘아 초콜릿 달고 맛있다. 좋다’ 하고 먹은 경우는, ‘분명한 오온의 새김'(사띠)이 없고 ‘아 맛있다’하는 행온(업)의 과보에 대한 고찰(위짜라)이 없으므로, 자연히 다음 번 초콜릿 혹은 달달한 것을 먹는 상황이 또 일어나기를 탐착하는 식온의 경향성은 쌓이고 증장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붓다께서 오온의 연기작용을 설명하시면서

“행行이 있으므로 식識이 있다” (십이 연기 중에서)

라고 하신 이유이다.

그러한 식識을 조건으로 연기법대로 명색이 있고, 육입이 있고… 결국 생이 있고 다시 노병사가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대로

“죽음이 있으므로 태어남이 있다”

이기에 또 다시 윤회하고 또 노병사를 겪고… 이를 무한히 반복하며 돌고 돌게 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영생을 추구하는 종교들의 엉뚱함이다. 왜냐고? 팔정도를 닦아 오온에 대한 취착을 버리고 열반에 들지 않는 이상, 일체의 모든 생명은 기본적으로 삶과 죽음의 굴레를 무한히 반복하는 일종의 영생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기본적으로 영생인데, 영생을 얻으려고 매주 일요일 마다 자신들의 신에게 영생을 주십사 간청하며 의식과 제사를 지내다니!)

하지만 연기의 진리(진실한 이치)대로, 초콜릿을 먹되, 식사로써, 오직 이 몸의 유지를 통한 기력의 쇠퇴와 질병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만 먹으며, 음식에 대한 탐착(식탐과 집착)의 행온(의지 작용)을 하지 않고 담마를 되새기면서(사띠하면서) 먹는다면, 그러한 ‘현명한 주의력(yoniso manasikara)’에 기반하여 음식을 먹는 행行온의 결과 다음 번 초콜릿을 먹는 상황이 또 일어나기를 탐착하는 경향성은 늘지 않고 줄게 될 것이다. 맛지마 니까야 ‘여섯의 여섯 모음’ 경(https://suttacentral.net/ko/mn148)에서 붓다는 이러한 길이 바로 궁극적으로 탐욕/성냄/어리석음의 완전한 소멸, 즉 궁극적으로는 열반으로 향하는 길(수행)이라고 설했다. 즉 그렇게 사띠하는 사념처 수행을 닦는 것만이 열반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오온이 연기법의 진리대로 조건반사적이고 기계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관찰하면 관찰할수록 참으로 신기한데, 또 하나의 예를 들어 이를 살펴보자.

화장실에서 인터넷(모바일)으로 뉴스를 전혀 보지 않던 사람도, ‘화장실을 갈 때마다 뉴스를 보는’ 신/구/의 행온을 하기 시작하면 일주일만 지나도 이제는 화장실에서 인터넷 뉴스를 보지 않으면 뭔가 허전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오온에서 행온의 의지작용(신구의 삼업)이 원인이 되어 결과적으로 뉴스에 탐착하는 새로운 식온과 그에 기반한 색수상행온, 즉 또다른 오온으로 연결되는 연기적인 윤회의 흐름을 조건반사적이고 기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결국 붓다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스스로 업(행온)을 짓기에 윤회(행온의 결과인 식온 및 그 식온에 기반한 또다른 오온으로 연결되는 인과 연기적인 흐름의 순환)는 조건반사적이고 기계적으로 계속되며, 스스로 그러한 업을 짓기를 그만두면 윤회는 그친다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구체적인 수행법은 팔정도 수행이라는 것이다. 더 쉽게 비유하면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살이찌지만, 아이스크림을 안 먹으면 살이 찌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단순한 진리인가?

오온은 서로 연기적으로 조건지어 일어나며, 이 오온의 작용 및 행온(업)과 그 과보 및 감각적 욕망의 위험성을 올바로 새김(사띠)하여 일시적으로 오온의 연기작용이 멈추면 사선정의 상태이며, 이 사선정에서 극대로 계발되는 사띠와 삼빠자나 능력을 사용해서 오온을 있는 그대로 여실지견如實知見하여 삼명三明, 즉 숙명명/천안명/누진명의 세 가지 밝은 지혜를 증득(증명경험으로 득)하게 된다. 즉 사선정에 들었다 나온 후 오온에 대해 여실지견한 마음은 오온의 윤회에 대한 염오를 일으켜 자연히 열반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아라한의 오온에서 색온(몸)이 소멸할 때, 즉 완전한 열반에 들 때, 아라한에게는 오온에 대해 취착하는 마음의 경향성(즉 식온의 경향성)이 이미 소멸하여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에 또다른 식온 및 그 식온에 기반한 또다른 오온으로 윤회하지 않고 금생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윤회의 흐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이며, 수행법이기도 하다.

위 문단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니까야의 경들을 스스로 찾아보기 바란다. 오온이 연기적으로 조건지어 일어남은 쿳다까니까야 우다나에서 십이연기가 언급된 ‘깨달음의 경‘과 맛지마니까야 ‘여섯의 여섯 모음 경’을 읽어볼 것이며, 오온을 올바로 새김(사띠)하여 오온이 일시적으로 멈추는 것이 선정임은 니까야의 도처에서 발견되는 초선부터 사선까지의 선정의 정형구에서 붓다가 수도 없이 언급하므로 조금만 검색하면 해당 경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맛지마 니까야의 ‘질문과 대답의 경‘에서 탐진치의 행온은 궁극적으로는 구행->신행->의행의 순서로 단계적으로 멈춘다고 설명하고 있다. 오온을 확대하여 그 작용을 자세히 설명한 십이연기에서도 언급하듯, 행行을 조건으로 식識이 있으므로 행온이 멈추면 식온이 멈추기에, 오온은 더 이상 유전하는 동력을 잃고 멈추게 되는 것이다. ‘사선정은 오온을 여실지견하게 하며 여실지견은 오온에 대한 염오를 일으키게 한다’는 부분은 앙굿따라 니까야의 ‘무슨 목적 경‘과 ‘의도 경‘을 읽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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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라는 민족종교를 따른다는 윤홍식이라는 사람이 홍익학당이라는 자신의 교육단체를 운영하면서 인터넷 동영상으로 ‘대승(불)교’의 화엄경 등을 강의하고 있는데, 붓다의 원음을 엄청나게 왜곡하고 폄하하고 있다.

팔정도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윤홍식 같은 사람들의 강의에 의지하지 말고 적어도 니까야(디가, 맛지마, 썅윳따, 앙굿따라, 쿳다까 니까야) 전체를 정독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체험을 통한 이해이다. 또한 현재 테라바다 전통 및 전세계적으로 위빠사나 명상센터 등에서 행하고 있는 ‘미얀마식 위빠사나 수행법’은 니까야 전체의 맥락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으며 대념처경 등에서 극히 일부만을 반영하여 개발한 수행시스템이므로 그것을 무턱대고 믿고 따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위빠사나는 초기불교 수행법인가 / 황순일'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1067)을 읽어보기 바란다.

적당히 남들 하는 대로 따라한들, 스스로 그 길에 대한 확신과 통찰이 없다면 과연 가능할까? 고작 대념처경 겨우 하나 읽어보고 과연 붓다의 원음을 제대로 보았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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