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UDDHISM/無心님의 불교이야기

부처님의 우려와 경계 - 종교(Religion)

살아 생전에 종교(Religion) 창시지가 되기를 거부하는 의사를 누누이 밝히고 강조하신 고타마 싯달타 붓다(석가모니 부처님, BC 624 ~ 544)는 당신 사후에 당신에 대한 우상화(형상의 우상화, 부처의 신격화)와 가르침에 대한 우상화(관념의 우상화, 가르침의 절대화)를 통해서 종교(Religion), 종파 등을 만들고 그것에 집착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을 매우 우려하고 경계하셨다.

부처님의 우려와 경계에도 불구하고 종교(Religion; Religion은 ‘re다시+lig신과 결합하는+ion것’이라는 의미)로서의 여러 불교 그리고 여러 종파와 여러 전통은 부처님께서 만든 것이 아니라 후대의 전문직 불교인들이 만든 것이다.

사실 부처님은 종교인이 아니라 과학자에 가깝다.

과학(물리학)은 모든 편견과 선입관을 버리고, 인간의 감각(특히 시각) 능력을 미시, 거시적으로 확장시켜주는 과학도구(원자현미경, 입자가속기, 천체망원경..등)를 사용하여 인간의 일상적인 감각능력의 한계를 극복하고 우주자연의 물질세계의 실상(실제 상태/모습)을 미시-일상-거시적인 수준에서 간접적으로 관찰한 경험을 토대로 물질세계의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에 대한 '경험적+합리적=과학적'인 지식체계를 세우는 학문이다.

부처님은 모든 편견과 선입관을 버리고, 수행을 통해서 계발한 정신능력(팔정도 계발 수행의 사마타를 통해서 미시, 거시적으로 확장된 인식능력)을 사용하여 인간의 일상적인 감각능력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을 포함한 우주자연의 물질-정신세계의 실상(실제 상태/모습)을 미시-일상-거시 순환(삼사라)적으로 직접 관찰한 경험을 토대로 물질-정신세계의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에 대한 '경험적+합리적'인 지혜를 계발하여 완성하고 완전히 바르게 깨달으셨다.

.
부처님께서는 "자신은 우주자연의 물질-정신세계의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법, 法; 연기의 진리)를 만든 자(창조자)가 아니라,

실상(실제 상태/모습)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 경험을 통해서 - 과학자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듯이 -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를 발견하여 깨달은 자일 뿐이고, 그 깨달음을 향해가는 길을 안내하는 안내자일 뿐이며,

당신의 가르침은 그 깨달음의 길을 안내하는 안내판 또는 강 건너 깨달음의 언덕(해탈의 언덕, 완전한 자유와 평화, '나'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과 완전한 행복의 경지)을 향해 가는데 필요한 뗏목(수단, 도구)일 뿐이다"라고 누누이 강조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을 뗏목, 안내판에 비유하면서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를 통해서 정신능력의 계발이 어느 단계 이상으로 깊어지면 부처(깨달은 자)의 가르침조차도 참고서일 뿐, 각자 스스로의 바와나-마야-빤냐(수행지혜, 통찰지혜; 수행의 통찰경험에 의해서 생기는 지혜)를 완성하라"고 누누이 당부하셨다.

부처님의 가르침(설명, 설법-법을 설명함, 경전; 안내판)이 매우 훌륭하기는 하지만 안내판(경전)의 detail에 집착하거니 안내판(경전; 가르침)을 절대화(목적화) 해서 목적지(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을, 부처님께서 누누이 당부하셨듯이,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각자의 깨달음의 증득(증명경험으로 득함)은 부처님의 경험이 아니라 개개인 각자의 경험인 바, 깨달음에 이르는 길(과정)의 인과연기적인 경험은 누구나 완전히 같지도 완전히 다르지도 않지만 어쨌든 부처님의 경험이 아니라 개개인마다 다른 각자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경험으로 계발한 통찰경험의 지혜(바와나-마야-빤냐)만이 무명(무지)을 완전히 타파하고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 완전한 자유(해탈)와 평화, '나'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빤냐/반야)로운 바른 사랑(멧타-까루나/자비)과 완전한 행복(열반)의 경지(목적지)에 도달하게 한다

.
모든 존재가
지혜(빤냐/반야; 연기의 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는 바른 지혜)와
자비(멧타-까루나; '나'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 속에서
진정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기를...

May all beings
be in Panna & Metta..
really be happy.. be peaceful.. be liberated...

______________

[PS(PostScript) 1] : 종교(宗敎) vs. Religion 

종교(宗敎)는 '(산)마루 또는 근본 종(宗) + 가르칠 교(敎)'의 합성어로, '산 정상(마루, 宗)에서 바라보듯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근본(宗)이 되는 훌륭한 가르침(敎)'이라는 뜻이다.

종교(宗敎)라는 용어는 5세기경에 중국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칭하기 위해 처음으로 쓰여졌다고 하는데, 동양문화권에서는 신(神)과는 무관하게 '근본이 되는 훌륭한 가르침'이란 의미로 쓰여져 왔다.

19세기 말 서양 종교학(신학, Religious studies or Science of Religion)이 일본에 소개되면서 'Religion'을 번역할 때, 같은 의미의 동양문화권 용어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학자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칭하던 용어인 종교(宗敎)를 Religion에 대응하는 번역어로 사용한 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Religion의 어원은 ‘re(다시)+lig(신과 잇는, 결합하는)+ion(것)’이다. 이 Religion(신과 다시 결합 하는 것)을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칭하던 용어인 종교(宗敎; 근본宗이 되는 훌륭한 가르침敎)라고 번역한 것은 번역의 오류다.

국어사전에서는 Religion의 번역어인 종교를 ‘신(神)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그런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체계’라고 정의하고 있다. 

종교를 이렇게 정의한다면, 우주자연의 물질세계의 보편적 이치/법칙에 대한 '경험적+합리적'(=과학적)인 지식체계를 세우는 학문인 자연과학(물리학)이 종교(Religion)가 아니듯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발견하고 가르친 우주자연의 물질-정신세계의 실상(실제 상태/모습)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에 대한 '경험적+합리적'인 가르침인 불교(佛敎; 부처佛의 가르침敎)는 종교(Religion)라고 말할 수가 없다.

Religion에 대응하는 번역어로 종교(宗敎)가 아니라 신교(神敎; 신神의 가르침敎)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면 용어가 주는 혼란과 갈등은 없었을 것이다.

.
[PS(PostScript) 2] : 자연과학(물리학)은 우주자연의 물질세계를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발견한 사실을 토대로 선입관이나 편견 없이 자연현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자연현상에 관한 보편적인 법칙과 조직화된 지식체계를 세우는 과학 분야다. 

자신과 세상(우주자연)을 ‘있는 그대로’ 직접 관찰하여 발견한 사실을 토대로 선입관이나 편견 없이 우주자연의 물질-정신세계의 실상(실제 상태/모습)과 보편적인(예외가 없는)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깨달으신 석가모니 부처님은 진정한 의미의 과학자다. 

아인슈타인이 노벨물리학상 수상을 축하하는 만찬 자리에서 만난 한 일본 물리학자에게서 부처님께서 발견하시고 설(설명)하신 연기법의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2600년 전에 상대성 원리(또는 법칙)를 발견하신 진정한 의미의 훌륭한 과학자다"라는 말을 했다는 일화도 같은 이유다.

종교(Religion)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1)[네이버 국어사전]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 (2)[다음 국어사전]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힘에 의존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 (3)[두산백과] 무한, 절대의 초인간적인 신을 숭배하고 신성하게 여겨 선악을 권계하고 행복을 얻고자 하는 일. 종교를 이렇게 정의한다면, 부처님 가르침(佛法, 佛敎)은 종교(Religion)가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佛法, 佛敎)은 '나'를 포함한 우주자연(물질세계와 정신세계)의 실상과 진리에 대한 '경험적+합리적'( =과학적) 가르침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과학적(=경험적+합리적) 원리와 과학적(=경험적+합리적) 실천법(수행법; 팔정도 계발 수행법)을 갖춘 과학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부처님 가르침(佛法, 佛敎)은 종교(Religion)가 아니라 과학'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자기 자신을 바꾸는 가르침이며 동시에 모든 사람을 바꾸는 '경험적+합리적'(=과학적) 가르침이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실상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실상(실제 상태/모습; 과학적 사실)이며,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진실한 이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진리이며, 

부처님께서 당신의 수행 경험을 시행착오를 빼고 '경험적+합리적'(=과학적)으로 정리하시여 가르치신 실천법(수행법;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법, 팔정도 바와나)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경험적+합리적'(=과학적) 실천법이기 때문이다.

.
[PS(PostScript) 3] : 과학 vs.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적인 차이점

과학과.부처님 가르침에는 유사성이 많이 있다. 오늘날 서양 과학(특히 20세기 이후에 등장한 상대성이론, 핵물리학, 양자역학, 양자색역학, 천체우주물리학 등의 현대 물리학)의 발견이 부처님께서 발견하고 가르친 우주자연의 물질세계의 실상(실제 상태/모습)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에 근접해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과하기 쉬운, 과학과 부처님 가르침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은 '추구하는 목적'의 차이다.

개인적, 집단적으로 과학에 투자하는 사람들과 과학자들 본인들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에게 있어서, 과학이 '추구하는 목적'은 과학도구를 개발하여 우주자연의 물질세계를 과학적(=경험적+합리적)으로 탐구(관찰 조사, 분석)하여 이해함으로써 자연을 내 마음대로 콘트롤(조작)하여 내(我, ego, 人; 즉, '나' 또는 '나'의 확장인 내가 속한 나의 학교, 회사, 국가 .. 내가 속한 인간 종족)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 내는 인간의 자기(我, ego, 人) 중심적인 과학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즉 과학이 추구하는 목적은 '나(我, 人, ego)의 행복'이다.

톨스토이가 그의 저서 <어느 어리석은 물레방앗간 주인 이야기>를 통해서 경고한 것처럼 "바른 목적을 잃어버린 논리(과학, 철학, 신학; 이론, 사상, 교리, 학문)는 제아무리 논리적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어리석은 것"이며, 바른 목적을 잃어버린 어리석은 논리와 어리석은 권력(정치권력, 금권-자본권력, 종교권력)의 만남은 매우 위험하다

오늘날 지구 생태계와 인류 자신의 생존마저 위협하는 현대 물질문명의 무분별한 개발의 폐해는 진정한(眞正한; 진실로 바른) 행복, 하나의 생명으로서의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라는 바른 목적을 잃어버린 과학이 가져온 폐해다

부처님 가르침이 추구하는 목적은 '나(我, 人, ego)를 초월한 행복'이다. 하나의 생명(생명현상; 자연현상이자 연기현상)으로서의 진정한 행복이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이야말로 모든 생명(생명의 무리; 중생衆生)의 '진정한 이익(진정한 행복, 괴로움의 근원적 소멸, 탐진치의 소멸, 마음의 부정성의 소멸, 나와 너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 자비의 증대와 확장)'이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이 품고 있는 모든 고(苦); 괴로움, 비참함, 참혹함, 폭력, 테러, 학살, 전쟁.. 등등의 모든 고통과 불행(misery)은 

나(我) 그리고 나의 확장인 내 가족, 내 나라, 내 종교(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등에 속한 구성원 자신들만 행복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온다.

All the misery the world contains
Has come through wanting happiness just for oneself." 

- 붓다(Buddha)

.
[PS(PostScript) 4] : 어떤 것이 진짜 진리(바른 진리; 正法)인가?

부처님께서 깔라마(Kãlãma)인들이 사는 인도북부의 한 조그만 마을(Kesaputta)을 방문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진짜 진리인지?
누가 진리를 말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어떻게 구별해야 합니까?"

"소문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대대로 전승되어 왔다고 해서 믿어서는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해서 믿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경전에 씌어 있다고 해서 믿어서는 안됩니다. 
왕이나 유명한 사람이 말했다고 해서 믿어서는 안됩니다. 
스승이 말했다고 해서 믿어서는 안됩니다. 
여래(如來, 그렇게如 온來 자; 부처님께서 자신을 지칭하는 호칭)가 말했다고 해서 믿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이익(진정한 행복, 괴로움의 근원적 소멸, 탐진치의 소멸, 마음의 부정성의 소멸, 나와 너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 자비의 증대와 확장)에 도움이 됨을 

스스로 경험적으로,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알게 되면 
그 때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십시오."

- <깔라마경(Kãlãma Sutta, 가림伽籃경), 앙굿따라 니까야, AN 3:65>

.
모든 생명(중생; 생명의 무리)이 근원적으로 안고 있는 괴로움을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

부처님께서는 '개와 사자의 비유’를 들어 설(설명)하셨습니다.

"개는 돌을 던지는 사람은 제쳐두고 
자신에게 날아온 돌을 물고 공격합니다. 
그 개에게 괴로움은 끝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괴로움 자체를 없애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고 잘못된 방법입니다.

사자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쏘는 사람을 공격합니다. 

마찬가지로 괴로움 자체를 없애려고 할 것이 아니라 
괴로움의 근원(근본 원인)을 없애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현상(괴로움 자체)에 끄달리지 않고 
그 근원(근본 원인)을 파악하여 해결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존재가 근원적으로 안고 있는 괴로움[고성제]과 그 근원(근본 원인)이 무엇인지[집성제]에 대한 가르침이며, 또한 그 근원(근본 원인)을 완전히 소멸[멸성제]시키고 완전한 자유(해탈)와 평화, 나와 너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자비)과 완전한 행복(열반)의 경지(상태),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에 도달[도성제]하는 바른 길인 팔정도의 계발(바와나)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
[PS(PostScript) 5] :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

노자는 우주만물에 대해 깊이 사유한 최초의 중국인으로 우주자연의 근본 질서 또는 이법理法(이치와 법칙)을 도道라고 이름 지었다. 노자는 우주자연의 근본 이치(원리)와 법칙인 도道가 개체적으로 구현된 현상을 덕德이라고 이름 짓고, 도道와 덕德에 대해 가르쳤다.

일생 동안 말로 (자세히) 가르치고 글로 쓰는 걸 싫어한 노자였지만, 히말라야(?)를 향해서 떠나는 생의 마지막 여정에서 만난 국경수비대 제자의 간곡한 권유로 도덕경으로 알려진 5천 여자 정도로 된 도道경과 덕德경을 저술하여 제자에게 남겼다.

도道경은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라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한다. 이 구절은 '말(언어)을 사용해서 도道라고 표현 가능可한 도道는 항상常한(진정한, 보편적인/예외가 없는, 완전한) 도道가 아니다非'라는 뜻이다.

인간의 말(언어)이란 인류가 지구 상에 존재한 이래 인간의 물질(육체)적, 정신적 경험을 기호화(개념화)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만든 언어는 실재(여기서는 道)가 아니라 실재의 근사치일 뿐이다. 때문에 도道 또는 득도의 경지를 말(언어)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도道에 도달하는 길(득도의 길)을 안내하는 것(언어로 가르치는 것)은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2500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그리하셨듯이..

.
[PS(PostScript) 6] :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道, 法)

“와서 보라”는 것이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태도입니다.

이 말은, “내가 발견한 '인간과 세상(우주자연)의 실상(실제 모습)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法)'에 대한 나의 가르침은 이러저러하다. 그것이 과연 그러한지 스스로 확인해 보라”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와서 (네 스스로) 보라”고 말씀하신 또 다른 이유는, 진리(道, 法)의 깨달음(득도), 해탈, 열반 자체란 말로 전하기(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궁극에는 스스로 보고 깨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은 자(부처)의 권위를 앞세워 자신과 자신의 가르침을 절대화하기보다는 언제나 비판과 검증의 대상으로 남겨두셨고, 입적(입멸, 무여열반, 빠리닙바나)하시는 순간까지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셨습니다.

.
깨달음(득도), 해탈, 열반 자체를 말(언어)로 전하기(표현하기)에 한계가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인간의 언어란 인류가 지구 상에 존재한 이래 인간의 물질(육체)적, 정신적 경험을 기호화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만든 언어는 실재가 아니라 실재의 근사치일 뿐이다.

2) 깨달음(득도), 해탈, 열반의 경험은 많은 사람들이 하는 일상적인 경험이 아니다. 따라서 깨달음(득도), 해탈, 열반의 경험과 상태(경지)에 관한 언어 표현이 개발되어 있지 않다. 

이것이 깨달음(득도), 해탈, 열반 자체를 말(언어)로 전하기(표현하기)에 한계가 있는 이유입니다. 

특히 윤회(삼사라)의 세계를 완전히 벗어나는 무여열반(빠리닙바나; 물질작용의 인연조건까지도 남김없이 벗어나는 열반; 반열반은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고대인도어 빠리닙바나의 한문 음사) 이후의 경험은 '언어(言語)로 표현할 길(道)이 끊어져(斷) 있음, 언어도단(言語道斷)'입니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그리하셨듯이 깨달음(득도, 해탈, 열반)에 도달하는 길을 안내하는 것(언어로 가르치는 것)은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
깨달음에 도달하는 길을 안내하는 부처님 가르침(佛法, 佛敎)에서 말하는 믿음은 종교(Religion; 神敎)의 믿음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말하는 믿음은 지혜('경험적+합리적'인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믿음입니다. 지혜('경험적+합리적'인 바른 이해) 없이 단순히 믿는 것은 맹목(盲目; 눈 먼, 보지 못함)적인 믿음, 맹신(盲信)이라고 합니다. 진리(法)를 깨달은 자(부처)는 존경의 대상이지 신앙의 대상은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말하는 믿음은 부처님께서 발견하시고 가르치신 진리(法)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그 가르침의 수행(팔정도 계발 수행)을 바르게 실천하여 스스로 직접 경험해 봄으로써 갖게 되는 믿음입니다. 가르침에 대한 '경험적+합리적'인 바른 이해를 통해서 스스로 신념을 갖게 되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이 가르침은 현세에 유익하고
시간을 초월하고
'와서 보라'고 할 만하고
실생활에 적용되고
슬기로운 사람 각자에게 경험된다." 

- <중 아함경(맛지마 니까야)>





맨 위로 맨 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