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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불교&명상 이야기

도현 “행복, 스스로 만들어야”

도현 스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스님은 들숨날숨에 마음을 집중하는 위빠사나수행 아나빠나사띠를 출입관식이라고 표현했다. 눈 감고 침묵 속에 물 같이 흐르는 호흡을 살피라고 했다. 호흡 위를 꽃잎처럼 떠가는 갖가지 감정과 망상이 흘러오고 가는 현상을 그저 바라보라 일렀다. 일어났다 소멸하는 감정에 끄달리지 않으면 마음이 고요해지며, 여기서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이 변한다는 제행무상을 깨닫는다고 했다.

출입관식 수행을 말하는 스님에게서 간화선과 위빠사나를 병행한 이력이 언뜻 비쳤다. 스님은 쌍계사 금당선원 선덕을 지냈으며 5년 동안 태국에서 위빠사나를 공부했다. 저서 ‘나라고 불리어지는 것에 대한 알아차림’에서 스님은 간화선과 위빠사나를 이렇게 설명했다. 인생에 대한 고통의 해결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간화선, 구체적으로 따져가면서 하나하나 밟은 것이 위빠사나라고 했다. 결국 최종 목적지는 하나이나 접근법이 다르다 했다.

도현 스님은 출입관식 수행을 일상에서 하길 권했다. 자신의 일부터 열심히 하고 틈새에 수행하길 원했다. 가뭄 들어 갈라진 논바닥 틈으로 물이 새어 들어가 논 전체가 촉촉히 젖는 것처럼. 스님은 “슬며시 삶이 달라질 것”이라며 “이렇게 생활하면 내가 여유롭고, 이때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나온다. 이것이 세상을 이익케하는 수행의 첫 걸음”이라고 강조했다.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지리산 화개동천 산골에서 조촐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스님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용심(用心)에 대하여’입니다. 낙엽을 쓸려면 빗자루를 찾아야 합니다. 그처럼 우리도 마음을 쓰기 위해서는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하겠지요. 잠깐 눈을 감고 호흡을 챙기면서 자신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한 번 찾아보십시오. 들숨. 앉아있음. 날숨. 눈을 뜨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현 위치가 어디입니까. 몸 있는 곳에 마음이 있으면 정상입니다. 보통 몸도 움직이지 않는데 마음은 여섯 범주의 세계를 분주하게 돌아다닙니다. 생각이 복잡하고 괴로울 때는 지옥, 배가 고플 때는 아귀도에 있습니다. 본능이 들끓어서 음란해질 때는 축생계에 있고,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다툴 때는 수라장에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업력 따라서 육도윤회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일 겁니다. 지금 여기,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일상에서 열 가지 마음 쓰는 법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타인의 인격을 존중해주는 마음, 칭찬하는 마음, 늘 베풀면서 행복해 하는 마음,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 마음, 남이 잘되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마음, 세상의 바른 가치를 존중하는 마음, 롤 모델을 잘 섬기는 마음, 겸손한 태도로 끊임없이 배우는 마음, 나보다 못한 사람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 세상을 위해서 나누는 열 가지 마음을 말합니다.

국내외 막론하고 자신과 똑같은 사람은 만나기 힘듭니다.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날 때가 있는데 바로 거울 앞입니다. 그런데 거울도 오른 손을 들면 왼손이 올라옵니다. 결국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닙니다. 왜 나와 같은 존재가 없을까요. 싯다르타 태자의 손가락에 답이 있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입니다. 너도 나도 우주에 하나 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은 귀하신 분이고 우리도 그렇게 귀하다는 사실을 기원전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류 최초의 인격선언입니다. 너도 나도 귀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부처이듯이 상대도 부처라고 생각하는 것이 첫 번째,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흔히 이야기를 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요즘 말랐다”가 아니라 “날씬해졌다”, “살쪘다”가 아니라 “편안해 보여”라고 말해보십시오. 타인의 결점만 유독 짚어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칭찬하기 어렵습니다. 남을 칭찬한다는 것은 여유로운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을 속 깊이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단점을 보더라도 그 사람의 개성으로 보고 존중합니다.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도 무한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남을 칭찬해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가 바로 다른 사람을 칭찬해주는 마음입니다.

처음 스님이 되어서 배우는 ‘자경문’의 구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끼고 탐하는 마음이 착한 길을 막고 자비롭게 보시하는 마음이 반드시 악한 길을 막느니라.’ 그리고 ‘화엄경’의‘십회향품’에 보면 ‘머리도 보시하고 눈도 빼주고 손도 주고 발도 주고 살가죽까지 다 주어도 인색한 마음이 없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봄에 씨도 뿌리지 않고 가을에 거둘 수 없듯이 잘 주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왜 복이 없는가 비관하지 말고 스스로 무엇을 베푼 적이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남에게 베푼 은혜는 잊어버리고, 남에게 받은 은혜는 절대 잊어버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는 늘 베풀면서 행복해하는 마음입니다.

요즘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많이 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삭제를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것만 남겨 놓습니다. 좋은 것만 자꾸 선호하다 보면 나쁜 것은 외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덮으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사람이 솔직하지 못하고 안 좋은 것은 남에게 전가시키려고 해서 삶이 계속 꼬이게 됩니다. 부모가 자식 챙기다보면, 자식이 분명히 잘못했는데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자신도 자식도 못 고칩니다. 자기변명과 합리화는 결코 불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스님들도 살생, 도둑질, 사음, 망어, 기어, 양설, 악구 등 십악의 죄를  참회하며 참회진언을 읊습니다. 그처럼 네 번째는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참 시기심이 많습니다. 흔히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프다’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 한 보살님은 동년배의 다른 아들과 자신의 아들을 항상 비교합니다. 결코 자비로운 눈이 아닙니다. 4년 전 제 토굴에 불이 났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종종 찾아오는 지리산의 도사가 “지리산 산신령들이 회의를 해서 도현 스님이 지리산에 못살도록 불을 냈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토굴이 낡았으니 새 토굴 지어서 살게 해주자고 회의한 것은 왜 모르냐”고 반문하며 도반과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다섯 번째는 남이 잘되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오늘날 통째로 몇 백 명을 싣고 날아다니는 세상입니다. 달나라까지도 가는 세상입니다. 이럴 때는 바람직한 정보가 중요합니다. 정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사마디(선정), 위빠사나(지혜)를 하도록 많은 사람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보통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가를 생각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더 나은 인격자로 만들어서 세상이 보다 인격적으로 나아지도록, 보다 행복해지도록 이끌어주는 종교입니다. 물질 위주의 삶보다 정신 위주의 삶을 잘 소개해서 한 사람이라도 덜 고통 받는 사람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원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행복한 체험을 세상의 행복이 되도록 만들어야 되겠다는 마음, 여섯 번째는 세상의 바른 가치를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 씀을 세상에 공포하고 알리는 선지자와 훌륭한 선각자들이 종교를 초월해서 많습니다. 불교 안에서 볼 때 스님들은 부처님 대신인데 우리 불자님들이 과연 잘 모시고 있는지 한번 반성해 봐야 합니다. 절 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스님이 귀하면 부처님 법도 귀하고 스님을 소홀히하면 부처님 법도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꾀죄죄하고 못났더라도 스님은 스님으로 대해야 합니다. 스님은 스님의 역할이 있고 신도는 신도의 역할이 있습니다. 기복적이라고 하는 할머니들의 정성이 조선시대 불교가 깔딱 고개를 넘어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런 것은 분명 본받아야 합니다. 스님뿐만 아니라 부모님과 은사님도 많이 계십니다. 좋은 친구와 후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분들이 우리에게 늘 조언을 해주십니다. 그래서 롤 모델을 잘 섬기는 마음이 일곱 번째입니다.

기업을 운영하시는 한 거사님은 제가 별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듣기를 잘 들어서 자신의 삶에 적용하고 저에게 항상 고맙다고 얘기를 하십니다. 배움을 구하던 선재동자는 바다에 가서 어부를 찾아가 바다에 대한 지식을 배우고 사람의 병을 보는 의사로부터는 사람을 대하는 마음은 자비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좌선하는 스님을 찾아가서는 그 고요한 마음이 사람들의 마음을 맑게 하고 불가사의한 힘을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마음씨의 부인을 만나서는 봉사의 정신에 감동되고 자비는 지혜의 열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모두가 다 법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덟째 겸손한 태도로 끊임없이 배우는 마음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마무리를 할 때가 되어 갑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을 많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제 초등학교 친구는 전시관에 그림을 설치하고, 그림이 팔리면 산 사람에게 갖다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 친구가 어느 날 자신이 잘못해서 그림이 찢어졌다고 합니다. 작가에게 변상해준다고 했지만 막무가내로 나무라더라는 겁니다. 그런가 하면 똑같은 일이 발생했는데 다른 작가는 걱정하지 말라며 “수리해서 팔던지 가지고 있으면 된다, 그러면 이 그림은 역사가 하나 생긴 것”이라고 했습니다. 친구는 너무 감동받아 눈물이 나오더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가 더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런 넓은 마음이 소중합니다.

이제 열 번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나름대로 축적한 기술이나 돈이나 좋은 가르침을 체험한 것이 있다든지 해서 누구든지 축적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사장시킬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되돌려 줘야 합니다. 큰 재산이나 정신적인 무엇이 없어서 세상에 크게 이바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분수 따라 조금씩 남을 돕고 함께 선한 곳으로 나아가는 마음을 갖고 살아간다면 그것도 세상을 위해서 내어주는 마음입니다. 겨울 산이 메말라 있을 때 그 산을 불태우려고 하면 불무더기가 얼마나 되어야 합니까. 성냥개비 하나면 됩니다. 선한 것 크고 작은 것이 있지 않습니다. 오직 선한 의지 하나입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없어도 얼마든지 세상을 위해서 기여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열 가지 마음 씀을 솥에 넣어 팍팍 삶으면 무엇이 될까요. 부처님도 사용하고 보살님도 사용하는 마음입니다. 바로 ‘자비심’입니다. 이 열 가지 마음은 어디에서 들어본 것 같습니까? ‘화엄경’ 가운데서도 노른자위라고 할 수 있는 보현행원품입니다. 그 보현행원품에 나오는 열 가지를 제 표현으로 옮긴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는 부처님 아들이고 딸이며 제자입니다. 자비심은 세상에 태어나서 자신이 속한 사회를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하는 것과 같은 덕성입니다. 서로 비교우위를 논할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개성을 열 가지 마음 씀으로 꽃피워서 세상을 아름답게 장엄하는데 조금씩 힘을 보탭시다. 내가 한 송이 꽃이 되어 여러 꽃과 더불어 화장장엄(華藏莊嚴) 세계를 이루어갑시다. 훗날 삶을 회향할 때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처럼 “이 세상 소풍 한 번 잘 왔다 간다” 하면서 가면 좋겠습니다.


도현 스님은
범어사 덕명 스님을 은사로 1963년 부산 범어사에서 입산 출가했다. 1965년 동산 스님에게 사미계를, 1972년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에게 비구계를 받았다. 제방선원에서 30여년간 정진했으며 태국에서 5년 동안 위빠사나 수행을 체득한 스님은 현재 지리산 연암 토굴에서 홀로 수행자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는 ‘조용한 행복’, ‘나라고 불리어지는 것에 대한 알아차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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